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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말과 글 그리고 시

등록 2019-02-21 18:02수정 2019-02-22 14:47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영화 세편을 연이어 보았다. 평소 영화 관람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들은 일종의 의무감도 작용해서 챙겨 보게 되었다. 극영화 <말모이>, 그리고 다큐멘터리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 말과 글과 시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들이었다.

<말모이>는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금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때에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했던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배우 유해진이 분한 허구적 인물 김판수는 처음에는 ‘돈을 모아야지 왜 말을 모으느냐’며 사전 편찬작업에 딴죽을 걸지만, 결국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말모이 사업에 뛰어든다. 그 자신 까막눈이었다가 뒤늦게 한글을 배워 익히는 김판수의 모습에서는 <시인 할매>와 <칠곡 가시나들>의 할머니 시인들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사실 나이로 따지면 김판수보다는 그의 어린 딸 순희가 할머니 시인들에 가깝다. 영화 속 순희처럼 할머니들 중 상당수는 일제 말의 조선어 교육 금지 때문에 문자 해독의 기회를 빼앗겼다. 여성의 교육에 부정적이었던 가부장제의 유습 탓도 있었다. 각각 전남 곡성과 경북 칠곡 할머니들의 문해 교육과 그 결실인 시집 출간을 소재로 삼은 두 다큐멘터리에서 할머니들이 문맹의 서러움을 뒤로하고 문해의 해방감을 만끽할 때, 그이들이 느낀 기쁨이 <말모이>의 민족주의적 울림보다 사소하거나 부차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어렵게 글을 익힌 할머니들은 자연스럽게 시 쓰기로 나아간다. 할머니들은 가까운 풍경과 사물, 날씨와 절기, 자신이 살아온 세월, 글공부와 시 쓰기 등 온갖 것을 시의 대상으로 삼는다. 박금분 할머니의 표현마따나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천지삐까리가 다 시다”. 박금분 할머니가 릴케를 읽지는 않았겠지만, <말테의 수기>에는 박 할머니의 시론과 통하는 대목이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두 지역 할머니들의 시는 자신들의 사투리를 거침없이 구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칠곡 가시나들>에서 할머니들이 ‘소잡다’(비좁다)와 ‘개갑다’(가볍다)라는 사투리의 뜻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장면은 <말모이>에서 김판수가 모아 온 전국 팔도 ‘빵재비’들이 사전 편찬자들한테 사투리를 가르치는 대목을 떠올리게도 한다.

“선산이 거기 있고/ 영감도 아들도 다 거기 있은게/ 고구마라도 캐서 끌고 와야 한디/ 감나무까지 다 감아 올라간 칡넝쿨도/ 낫으로 탁탁 쳐내야 한디/ 내년엔 농사를 질란가 안 질란가/ 몸땡이가 모르겄다고 하네.”(윤금순 ‘선산이 거기 있고’)

“사랑이라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박월선 ‘사랑’)

두 영화의 차이점도 엄연하다. <시인 할매>에 비해 <칠곡 가시나들>은 한결 경쾌하다. 지난 19일 <칠곡 가시나들> 시사회에 참석한 소설가 김훈은 “과거의 기억과 고통에 매몰돼 있지 않고 발랄한 현실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그 차이를 짚었다.

<시인 할매에서> 아들을 앞세우고 잇따라 남편도 떠나보낸 윤금순 할머니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망설이다 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내 사연과 아픔을 이해받을 수나 있겠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하는 게 윤 할머니의 시였을 것이다. 윤 할머니뿐이겠는가. 위로이자 놀이라는 시의 두 기능을 두 다큐멘터리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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