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5년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그날의 실체를 향해 ‘겨우 조금’ 다가갔다. 사고를 참사로 치닫게 했던 박근혜는 무너졌다. 세월호는 인양되었다. 하지만 참사의 진실이 인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진사 그날은 5월18일이었다. 1980년 5월이 아닌 2014년 5월이었다. 304명의 애달픈 목숨이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지 꼭 한달이 지난 무렵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사고였다. 하지만 국가의 총체적 무능력이 빚은 구조적 살인이기도 했다. 시시각각 날아드는 속보에 넋을 잃은 채 한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숱한 이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 누구든 발언대에 올라 이 참사의 실체와 해법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혜를 모아보자는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와 자본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바다에서 무능하기 짝이 없던 공권력이 광장에선 어찌나 유능했던지 ‘세월호 참사 만민공동회’는 시작부터 진압경찰의 포위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오늘은 5·18이다! 세월호 학살은 광주의 학살이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땅거미가 질 무렵 다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울의료원 영안실에 안치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염호석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경찰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다는 얘기였다. 죽은 이의 몸을 함께 지킬 사람이 절실했다. 친구들과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사태는 이미 끝난 뒤였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시신마저 빼앗긴 노동자들은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 어떤 이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흐느꼈다. 위로 불가능한 무거움이 정지된 듯 흐르는 밤이었다. 그때 다시 속보가 날아들었다. 광화문광장으로 향하던 대학생 침묵행진단이 경찰에 포위된 채 연행될 위기를 맞고 있었다. 광장으로 달려갔을 때 청년들은 마구잡이로 연행되고 있었다. 아무런 과격행위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저항이 왜 그런 식으로 짓밟혀야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없을 것이다. 2014년, 우리 시대의 5·18은 자정을 넘긴 채 비명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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