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차별금지법이 아직도 제정되지 않고 있을 줄. 문재인 대통령은 중앙과 지방 양쪽에 모두 강력한 집권 기반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이제 더 이상 ‘나중에’는 필요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성평등한 사회 만들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선거가 끝났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더불어민주당이 모든 걸 차지했다. 지방선거가 시작될 무렵 자유한국당이 내걸었던 슬로건은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였다. 국민들에게 민주당을 견제하자고 호소하는 의도였겠지만 결론적으론 선험적 예언이 되었다. 보수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시쳇말로 ‘폭망’한 것이 한국 정치판에 큰 균열을 가져오겠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역대 지방선거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녹색당과 정의당의 선거 결과, 즉 진보정당이 거둔 성과다. 정의당은 광역·기초 비례대표에서 지역에 따라 정당지지율 3위와 2위까지 올랐고, 두 자릿수의 지방의회 의원을 갖게 되었다. 녹색당은 비록 당선자는 없지만 결코 아쉽지만은 않은 빛나는 성과를 얻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정의당 후보마저 제치고 4위, 제주도 도지사 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이외 지역에서 출마한 녹색당 후보들의 활약까지 보태져 녹색당은 마침내 환경운동단체가 아니라 ‘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각인하는 데 성공했다. 녹색당이 집권 의지가 있는 정당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동안 고인 물처럼 답답하게 정체되어 있던 ‘진보 소수정당’ 판에 다양성과 신선함이라는 파문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더군다나 이 파문에는 부정할 바 없이 20대 여성 정치인의 거침없는 당당함이 주는 감동, 기존의 정치인들과 정당은 눈치만 보면서 꺼리고 있던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진정성이 있었다. 보통 선거 전략은 시류에 편승해서 알맹이는 빼버리고 그럴싸한 껍데기만 취하기 마련이다. 녹색당의 서울시장 선거 전략은 사회적으로 이슈인 페미니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제를 선거운동본부가 자기 안으로 녹여내고, 후보가 적극적으로 끌고 가는 형태였다. 후보의 선거 벽보가 뜯기는 것마저 가볍지 않은 의미를 가질 정도였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전조가 아닐까. 신지예 후보의 1.7% 득표율은 낮지만 결코 사소하진 않다. 만 19살 미만 청소년들의 모의 선거에서는 신지예 후보가 박원순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제치고 1위를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어쩌면 미래에서 살짝 삐져나온 희망의 한 자락일지 모른다. 하나의 선거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선거가 기대되는 건 처음이다. 2020년까지 진보정당들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수 있을 테고, 우리는 또 다른 역사적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선거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가장 큰 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온 나라를 파랗게 물들이는 것에 성공한 여당,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넘어가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부터 지방선거까지 싹쓸이하듯이 승리를 거둔 여당이 해야 할 일이란 명백하다. 결코 오만하고 부패하지 말 것, 그리고 현실 정치 운운하며 소신 없이 슬쩍 미루어두었던 현안들을 꺼내어 과감하게 개혁해 나갈 것, 그래서 정권 교체와 적폐 청산을 외치면서도 결국 기득권을 물려받아 그 안에서 무늬만 다른 새로운 적폐가 되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 등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렇게 빨리 북한이 비핵화를 하게 될지,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될지, 종전까지 꿈꾸게 될지 말이다. 불과 이삼년 전만 해도 비관적이었던 일이었다. 또한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차별금지법이 아직도 제정되지 않고 있을 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위기 이후 총선에서 국민들은 여대야소를 만들어주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개혁 하나도 밀고 나가지 못하고 보수 개신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동성애 혐오가 사회의 새로운 차별과 폭력으로 등장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노무현 대통령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하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중앙과 지방 양쪽에 모두 강력한 집권 기반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조건은 훌륭하게 갖추어지지 않았는가. 이제 더 이상 ‘나중에’는 필요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성평등한 사회 만들자. 더 미룰 ‘나중’이란 없다.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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