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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대는 달라졌는데 끝나지 않은 ‘길채·장현의 싸움’

등록 2023-11-29 16:27수정 2023-11-30 02:36

엠비시 드라마 ‘연인’ 방송화면 갈무리.
엠비시 드라마 ‘연인’ 방송화면 갈무리.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연인’이 화제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모진 일을 겪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똑바로 말하는 유길채(안은진)가 멋졌다. 오랑캐 손에 어깨만 잡혀도 정조를 잃었다고 비난하는 시대에 이장현(남궁민)이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까” 라며 상대의 경험을 다르게 해석하는 장면도 좋았다. 아름답고 뭉클한 장면도 많았지만 내겐 세간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인 장철(문성근)이 분노에 차서 붓을 휘갈기며 글을 쓰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 나라 사직을 위협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저들은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며 나라의 이익을 팔아먹는 매국노요.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인들이며, 문란하게 남색하는 더러운 색정들이다.”

평소에 임금의 비겁함과 사대부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던 장철이 갑자기 순결하지 않은 여성과 남성 간의 성관계를 멸망의 원인으로 열거하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한탄이 흘러나왔다. 많이 보던 모습이다. 성소수자와 페미니즘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흔히 듣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부의 희생양이 필요한 위정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는 중인 지난해 12월엔 성소수자 관련한 모든 인쇄물, 영상물, 인터넷 홍보 등을 금지하는 ‘전통적 성관계 선전 금지법’을, 올 7월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과 의료적 조치를 전면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푸틴 대통령과 의회는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동성애를 인정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서구, 즉 악마에 맞서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성전’이라고 설명한다. 진짜 속셈은 따로 있을 텐데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규모 전쟁이 이런 명분으로 포장되는 건 기가 막힐 일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도 동성애를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하고 동성애자를 색출하고, 수용소에 감금하고 학살했다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장철의 저 글을 17세기 유학자의 고루한 인식의 발로로 가벼이 넘기기 어렵다.

장철은 평소 지조 높은 선비인 양 했지만, 인조가 약점을 들추자 양반의 신분을 잃을까 불안감에 휩싸여 죄 없는 사람들을 반역죄로 몰아 고문하는 데 앞장 선다. 제 아들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마저 ‘드높은 도덕심’의 발로인 양 포장한다. 인조는 자기 자리를 뺏길까 전전긍긍하며 급기야 세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망상에 빠졌다. 나라의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역사는 무능한 왕이자 아들을 죽인 아비로 그를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선택은 달랐다. 유길채는 자기 이익을 셈하는 대신 늘 사람들에게 ‘함께 살자’고 말했다. 이장현은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사람은 사람이기에 귀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리 힘든 처지에 놓여도 비겁해지지 않았고, 무책임하지 않았다. 낯설다 하여 미워하거나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일이 없었던 이유다.

드라마에서 받은 감동이 무색하게 현실로 고개를 돌리니 인조를, 장철을 닮은 이들이 넘친다. 게임홍보 영상에 나온 손가락 모양이 이상하다고 문제 삼자 그 비위를 맞추느라 관련 기업들이 앞다투어 사과문을 올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길채와 장현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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