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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정치와 싸우는 문학

등록 2017-09-21 18:24수정 2017-09-21 20:21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노작가는 자주 울먹였다. “박근혜가 있었으면 오지 못했을 텐데, 촛불 데모 덕분에 조국에 올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제주4·3 당시 인두로 살을 지지는 고문으로 젖가슴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심포지엄 기조강연 중 “어처구니없는 폭력으로 뒤덮인 섬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떼죽음이란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거기 있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화산도>를 써야 했다”고 그는 역시 울먹이며 고백했다.

제주4·3을 다룬 원고지 2만2천장짜리 대하소설 <화산도>의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이 한국을 다녀갔다.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16일 방한한 그는 파주 비무장지대에서 열린 시상식과 심포지엄, 기자회견, 초청강연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19일 출국했다. 1925년생이니 만으로 92살 고령이면서 여전한 현역 작가이고, 시상식이 있던 17일은 소설가 현기영을 비롯한 고향 제주 후배들과 자정이 넘도록 통음할 정도로 강건한 체력을 지닌 그였지만, 70년 전 4·3의 아픔을 되새기거나 분단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는 아이처럼 풍부하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필생의 역작인 <화산도>가 뒤늦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뒤 출간 기념 학술회의에 맞추어 2015년 10월 방한하려던 그의 계획은 난데없는 용공 논란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4월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제주를 방문했다가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 세력을 비판한 발언이 ‘용공’으로 둔갑되어 보수 진영의 십자포화를 맞은 결과였다.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시상식과 부대 행사는 그래서 뒤늦은 <화산도> 완간 기념식의 성격 역시 지니게 되었다.

자주 울먹이기는 했어도 작가 경력 60년의 내공은 역시 탄탄했다. “90이 넘은 이 노인이 아직도 혁명 정신은 젊은이 못지않다”고 그는 기조강연에서 강조했다. 그는 20대에 일본공산당에 입당했고 총련 조직에서도 활동했으나 둘 다 탈퇴하고 문학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혁명’이 정치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닐 게다. 자신의 문학을 두고 “일본 문학이 아니라 일본어 문학”이라 말하는 뚜렷한 주관, 사소설이 지배하는 일본 문단에서 4·3을 비롯한 정치적 주제를 끈질기게 천착하는 문학적 태도, “정치와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문학으로 도망치는 작가들이 있지만, 나는 정치와 맞서 싸우면서 지금까지 써 왔다”는 자부 등이 그가 말하는 ‘혁명 정신’에 속할 것이다. 그런 정신에서 빚어져 나온 발언들은 밑줄을 긋고 두고두고 곱씹고 싶다.

“현실과의 길항 없이 체제 순응을 하다 보면 마침내 그 소설은 현실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의 예술성을 상실한 정치적 작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정치적인 것을 녹여서 문학의 자양분으로 섭취해 더욱 문학성이 강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적 자세이며, 바로 나의 작품의 집대성인 <화산도>는 그것의 구현물입니다.”

수상 소감과 기자회견 등에서 김석범이 거듭 힘주어 말한 것은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친일파의 득세 이후 왜곡된 해방 공간의 역사를 재심(再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화산도>의 배경인 4·3 대학살의 뿌리도 이승만 친일파 정권에 있다”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촛불혁명 이후 달라진 서울의 공기를 마시고 간다. 내년 4·3 70주년에 맞추어 다시 오고 싶다”고 말한 김석범. 조용하지만 뜨거웠던 그의 3박4일 행보에서 한국 사회와 문학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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