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선임기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지난 4월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 일본 우익들은 하루키를 ‘매국 작가’라고 비난했다.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난징 시내를 점령하고 대량 살인을 자행했습니다”라는 소설 속 한 인물의 발언 때문이었다. 이런 소설 내용과 그에 대한 우익의 반발이 알려지면서 하루키는 균형 잡힌 역사관을 지닌 의식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런 평가는 올바른 것일까. <기사단장 죽이기>는 주인공이 몇 달간 머물게 된 산속 저택의 주인인 늙은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숨겨 놓았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둘러싼 수수께끼와 모험을 다룬다. 아마다는 1938년 오스트리아 유학 당시 나치 요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연인을 잃고 강제 귀국 조치를 당했으며, 그의 동생인 음악가 쓰구히코는 난징학살 때 명령에 따라 포로의 목을 베어야 했던 트라우마로 자살을 택했다. 청년이 노인을 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을 담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런 일들을 겪은 아마다의 상처와 분노, 그리고 역사의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소설 말미에서 저택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불타 없어지고 마는데, 그 소식을 접한 주인공 ‘나’의 반응은 이러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소실되어야 했던 작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 그림에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혼이 너무 강하고 너무 깊이 배어 있었다. 물론 훌륭한 그림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불러내는 힘을 지닌 그림이었다. ‘위험한 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그런 존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 대중의 눈에 드러내는 일은 적절치 못할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그림에서 튀어나온 인물인 기사단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일도 무척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그림을 대중에 공개할지를 둘러싼 토론 과정에서 나온 발언인데, ‘나’가 결국 기사단장의 이 말에 승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한국어판 출간 뒤 출판사와 서면 인터뷰에서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라고 밝혔는데, 이것은 위험한 역사 상대주의 또는 역사 허무주의적 발언으로 들린다. 식민과 침략, 그리고 학살이라는 가해의 역사에 대한 판단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 우익의 반발을 산 “이른바 난징학살”(=소설 속 표현)과 관련해서도, ‘가해자’인 일본인 쓰구히코의 트라우마만 부각될 뿐 피해자인 중국인의 처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점은 문제라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예의 서면 인터뷰에서 “어떤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쓰인 소설은 대부분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며 이야기(=소설)가 지닌 ‘선량한 힘’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량한 힘’은 ‘기사단장 죽이기’가 지녔다는 ‘위험한 힘’의 상대 개념처럼 읽힌다. 난징학살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가 불에 타 없어져 마땅한 위험한 작품이라면,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세계란 대체 무엇일까. 하루키의 수상쩍은 역사관,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루는 ‘선량한’ 문학관은 한국 수구 문인들의 ‘순수문학’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일본 우익의 하루키 비판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 아닐까.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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