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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소진에게

등록 2017-04-06 18:38수정 2017-04-06 21:34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그가 멈춘 곳에서, 그를 잃고서, 그러나 그와 함께, 세기말의 한국 소설은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1997년 4월23일치 <한겨레신문> 15면. 네 부음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기사답지 않게 감상적이고 선언적이었다. 그 지면이 네가 기자로 몸담았던 곳이었고, 글쓴이가 네 소설 독자이자 문학기자이기 전에 직장 선배이기도 했던 이 칼럼의 필자라는 사실이 조금은 변명이 될까.

얼마 전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진 두장과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네가 교열부에서 문화부로 건너온 1994년에서 95년 사이 어느날 부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었어. 신연숙·조선희 선배와 임범·강희철씨, 그리고 너와 내가 등장하는 그 사진은 당시 누군가의 필름 카메라로 찍어 인화해 둔 것이었지.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봄 또는 가을이었던 듯한데 신문사 입구에서 찍은 게 한장, 효창공원쯤으로 짐작되는 옥외에서 찍은 게 또 한장이더군. 터무니없이 넓은 바지통이 촌스럽긴 해도, 우리 모두 무슨 신나고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양 활짝 웃는 표정이 새삼스럽더라. ‘이십몇년 뒤의 너희에 비해 우린 아직 젊고 풋풋하다’는 뜻의 웃음이었던 것인지.

1994~5년 어느 날, 당시 <한겨레> 문화부 동료들과 서울 효창공원을 걷고 있는 김소진(오른쪽에서 두 번째) 작가. 최재봉 제공
1994~5년 어느 날, 당시 <한겨레> 문화부 동료들과 서울 효창공원을 걷고 있는 김소진(오른쪽에서 두 번째) 작가. 최재봉 제공
그래, 20년이 흘렀구나. 잔인한 농담과도 같았던 너의 이른 죽음을 접하고 원통하고 두렵다기보다는 황망하다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했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네 얼굴은 20년 전 그 젊음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만, 사진 속 나머지 멤버들은 세월의 융단폭격에 속수무책으로 늙어 버렸다. 특히 내가.

늙음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해도, 20년 전 부음기사 말미의 다짐과 약속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라기보다는 해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네가 없는 한국 소설의 20년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세기말을 건너 새로운 세기도 벌써 20년 가까이에 이르고, 문단에도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났고,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어른들도 계시지. 박경리·박완서·이호철·이문구·이윤기 선생님 등등. 최근 두어해는 롤러코스터 같은 일들도 있었어. 표절과 문학권력 논란으로 문학 잡지들에 일대 혁신의 물결이 밀어닥쳤고, 한강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으로 한국 문단 전체가 한껏 고무되기도 했지. 문학 바깥에서도, 김대중·노무현에서 용산 참사와 세월호를 거쳐 박근혜 탄핵까지 엄청난 일들이 있었지.

1994~5년 어느 날, 당시 <한겨레> 문화부 기자였던 김소진(뒷줄 오른쪽) 작가가 동료 기자들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본사 앞에서 웃고 있다. 최재봉 제공
1994~5년 어느 날, 당시 <한겨레> 문화부 기자였던 김소진(뒷줄 오른쪽) 작가가 동료 기자들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본사 앞에서 웃고 있다. 최재봉 제공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나는 ‘소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 보곤 한다. 네가 없는 사이 한국 소설이 나름대로 발전과 모색을 거듭해 온 것은 사실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부재로 인한 공백이 아쉬웠던 지난 20년이었다는 생각이다. 민중의 삶에 튼실하게 뿌리내린 가운데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총체적 시야를 놓치지 않는 네 소설의 알짬은 네가 활동했던 90년대에 못지않게 21세기 전반부인 지금도 요긴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10주기였던 2007년엔 그래도 추모 문집 <소진의 기억>이 나왔고 용인 네 묘지에도 많은 이들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주기인 올해는 <문학동네> 여름호가 추모 소특집을 꾸민다는 소식 말고는 상대적으로 무심한 것 같아 섭섭하고 미안하기만 하구나. 하긴 나부터도 바쁘다는 핑계로 까맣게 잊고 있다가 네 절친인 정홍수 형의 전화로 비로소 네 기일을 떠올렸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니. 음력으로 기일이 다음주 화요일이니, 주말인 내일은 오랜만에 네가 있는 용인에 가 보려 한다. 20년 전,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 무렵 그곳은 환장할 것만 같은 꽃잔치로 사뭇 어지럽겠지.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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