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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꽃보다 시

등록 2017-03-09 18:22수정 2017-03-09 20:06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섬진강 언저리에 매화가 올라오고 구례 산동마을에 산수유꽃 피면 무작정 남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벌써 십수년도 더 된, 동무들과의 봄맞이 ‘의식’이다. 낮엔 꽃에 파묻히고 밤엔 술과 음악에 젖어 이박삼일쯤 유유자적하다 오면 다시 한해를 버틸 힘을 얻는 느낌이었다.

남녘에서 화신(花信)이 들려오기는 제법 되었건만 올해는 아직 여행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시절이 수상한 탓인지, 근력이 떨어지고 열정도 식어서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아쉬운 대로 일터에서 가까운 효창공원으로 꽃 마중을 나가 본다. 산수유는 아직 꽃망울 상태고 매화도 소식이 먼데, 공원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것은 봄까치풀이라고도 부르는 개불알풀꽃이다. 김구 선생 묘역 남쪽 볕 좋은 자리에서 2월 하순이면 피기 시작한다. 워낙 작고 희미해서 다가가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못 본 채 지나치기 일쑤. 핀 자리 때문인지 내게는 그 꽃이, 김구 선생이 강조하신 문화의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여리고 보잘것없지만 누구보다 먼저 겨울을 이겨내고 봄소식을 알리는 작은 거인. 지금처럼 나라 안팎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그 사소한 풀꽃이 한결 어여쁘고 대견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휴대전화에 풀꽃 사진을 몇장 담고 사무실로 돌아와 책을 집어 든다.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헤우게의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북국답게 겨울과 눈이 흔하지만, 어쩐지 공원의 작은 봄꽃을 떠올리게 하는 시집이다. 헤우게는 평생을 과수원 농부로 일하면서 시를 썼고 독학한 언어로 외국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제 삶의 근거이자 환경인 자연과 존재의 본질을 쉽고 간결한 언어로 노래한 시인이다.

“꽃노래는 많으니/ 나는 가시를 노래합니다./ 뿌리도 노래합니다-/ 뿌리가/ 여윈 소녀의 손처럼/ 얼마나 바위를 열심히/ 붙잡고 있는지요”(‘야생 장미’ 전문)

“여름은 추웠고 비가 많았다/ 사과가 푸르고 시다/ 그래도 사과를 따고 고른다/ 상자에 담아 저장한다/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다/ 이곳은 북위 61도이다”(‘푸른 사과’ 전문)

헤우게가 노래하는 자연은 화려하고 장대하지 않다. 자신의 경험과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이 헤우게의 시를 이룬다. 언어 역시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투명하며 깔끔하다. 헤우게 시의 감동은 진솔하고 겸손하며 따뜻하게 대상과 공감하는 태도에서 온다.

가령 시집 표제작에서 시인은 폭설이 내리는 과수원에서 나무들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막대로 두드리거나 가지를 당겼다 놓아 쌓인 눈을 털어줄 따름이다. 그러느라 온몸에 눈을 뒤집어쓰면서도 그는 나무를 원망하는 대신 그들의 당당함과 여유를 찬미한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 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부분)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 길지 않은 시집을 천천히 읽고 나면 절로 마음이 맑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공원 한구석 작은 봄꽃과 눈 맞출 때처럼 설렘과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왜 안 그렇겠는가. 시인 자신 이 시들을 쓸 때 샴페인 같은 봄의 기운에 들렸던 것을.

“노시인이 시를 쓰네/ 행복하도다 행복하도다 샴페인 병처럼/ 그의 내부에서 봄이/ 기포들을 밀어올리니/ 병마개가 곧 솟아오르리.”(‘노시인이 시를 쓰네’ 전문)

그렇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버석거리는 심사와 어수선한 바깥 사회에도 기필코 봄은 오지 않겠는가.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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