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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검은 시가 온다

등록 2017-02-09 18:20수정 2017-02-09 20:58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황현산 방민호 신덕룡 김사인 최수철 정끝별 나희덕 방현석 김탁환 서영채 임철우 정호승. 시와 소설, 평론 등 장르도 다르고, 같은 장르라 하더라도 문학적 색깔과 지향이 판이한 이 열두 문인을 한데 묶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2014년 상반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문예기금 지원 대상자 선정을 위한 책임심의위원 후보로 추천되었다가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배제된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특검 공소장에 따르면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은 심의위원 후보로 추천된 105명 가운데 문학 분야 12명을 포함한 19명에 대해 ‘위촉 불가’ 뜻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에 내려보냈고 문체부 담당 공무원들이 이를 예술위 사무국 임직원들에게 전달해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어디 이들뿐이랴. 2016년 예술위 심의위원 풀에서는 강은교 권성우 김형중 신형철 윤대녕 은희경 이문재 등 30명 가까운 문인이 ‘선정배제’ 딱지를 받았고, 이밖에도 이윤택 백가흠 신용목 조해진 황인찬 황정은 등 문인과 <발견> <시작> 같은 문예지들, <소년이 온다>(한강)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2>(공지영)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이재무) 같은 단행본들이 각종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다.

특검 공소장의 공소사실과 범죄일람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들이 도대체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식견이 있는 집단인지가 궁금해진다. 알량한 돈과 권력으로 문화와 예술을 억누르고 길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무지인가 용기인가. 예술가들이란 무엇보다 독립과 자유, 자존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저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블랙리스트로 상징되는 억압과 배제는 오히려 예술가의 저항과 극복 의지를 자극할 뿐이다.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합동 시집 세권은 블랙리스트로 문인들을 순치시키고자 했던 행위가 거꾸로 시인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운 결과라 하겠다. 시인 61명이 ‘촛불혁명’을 노래한 시들을 모은 <천만 촛불 바다>(실천문학사), 참여적 문인 모임 ‘리얼리스트 100’ 소속 시인 42명의 최근작과 대표작을 모은 <구름보다 무거운 말>(갈무리), 그리고 블랙리스트 시인 99명의 시선집 <검은 시의 목록>(걷는사람)이 그것들이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저들이 국민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진압을 하기 위해서다/ 국헌을 걸레로 만든/ 쥐들의 내란과 개들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서다”

<천만 촛불 바다>에 실린 백무산의 시 ‘광장은 비어 있다’는 그의 80년대 절창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를 떠오르게 한다. <구름보다 무거운 말>에서 정우영 시인도 “여기는 비로소 민주세상, 해방구입니다./ 광장은 무혈혁명축제를 만끽하는 중입니다”(‘통쾌한 민주주의가 유유히’)라며 화답한다.

<검은 시의 목록>에 실린 시 중에서는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가 눈에 뜨인다.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로 시작하는 이 시는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한 옛 동독 정보당국의 감시를 고발하지만, 우리 현실에 대입시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시인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라 개탄하는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긴 이들에게 하고픈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온의 딱지를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면, 불온에 관한 김수영의 오래된 말을 들려주고 싶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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