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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국적인 것?

등록 2016-07-22 20:45수정 2016-07-22 20:5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꽃과 풍경>
신지영 지음, 미술사랑, 2008

에드 해리스가 감독, 주연한 영화 <폴락>(Pollock, 2000)은 미국의 유명한 추상화가 잭슨 폴락의 일대기다. 폴락은 원래 사회의식이 뚜렷한 사실주의 작가였으나 갑자기 추상표현주의의 영웅이 된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붓는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영화에서 그는 자기 작품에 소변을 본다. 실제로는 벽난로였다는 얘기도 있다.

천재의 자유로운 이미지. 그러나 그의 예술은 냉전시대의 정치적 산물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회화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할 때, 미국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전통 회화가 아닌 ‘창조의 광기’, ‘남성’, ‘순수’의 상징으로서 ‘그리기’가 아닌 물감통을 들고 돌아다니는 ‘액션’이었다(61쪽). 피터 월렌의 지적대로, 폴락이 대가로 등극한 시기는 매카시즘 광풍과 일치한다. 그래서 폴락은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신지영의 역작 <꽃과 풍경>은 이야기가 풍부하다. 다양한 읽을거리, ‘세밀한 필치’, 연구자로서 노동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은 지난 세기, “문화연구로 본 한국 현대 여성미술사”(부제)이다. 내가 읽은 박사학위 논문이 출판된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저술이다. 현대미술사에서 ‘한국화, 한국적, 한국성’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미술사,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기호학, 정신분석 등 다학제 방식으로 분석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화가들과 우리 현대사가 녹아들어가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한국 현대사, 페미니즘 입문서로서 망설임 없는 ‘0순위’다.

내가 자주 듣는 말 “너의 사고방식은 한국적이지 않다”, “페미니즘이나 동성애 이슈는 서구의 산물이다” 등의 이야기가 실제로는 얼마나 서구 중심적인 사고방식인지를 미술사를 통해 규명한다(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의회주의, 기독교는 삼국시대에서 왔나?) 한국성. 이것은 외세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규정되며 동시에 젠더적이다. 문인화가 조선의 전통이고 남성의 작품이라면, 채색화를 그리는 여성 화가는 서구적이거나 왜색으로 간주된다.

고유한 한국성이란 불가능한 개념이므로 일본이나 서구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잭슨 폴락의 ‘미국성’과 같은 원리다. 수묵화와 채색화, 추상화와 구상화,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 이 모든 이분법은 ‘한국성(순수)’ 대 ‘외세(오염)’라는 강대국을 상정한 이분법, 그리고 피해의식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 민족주의 담론을 “페티시 서사”라고 명명한다(262쪽). 민족주의의 실제 내용은 없으므로, “~이 아닌 것”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트라우마. 식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에 대한 천착과 연구는 금기시하고, 역원근법(逆遠近法, 우리의 전통을 조선에서 찾음)의 논리로 “한국적 미술=추상=자유진영=문인화=반(反)채색화=반일본=조선 남성=조선의 섹슈얼리티”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76쪽). 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유명한 개념, 차연(差延, 디페랑스)이다. 나는 진태원의 번역, 차이(差移)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데 단어의 의미는 하나의 표현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의미는 계속 이동하면서 미루어진다. 그래서 “한국적인 것”은 지연(遲延)에 지연을 거쳐 “조선 양반”에까지 이르게 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프로이트는 문화적 담론을 바꿀 때 치유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다. 새로운 언어의 핵심은 강자로부터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 탈식민주의와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보충물로 여기지 않는 성별 관계의 변화, 페미니즘이다. 탈식민 여성주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기반이다. 여성의 노동에 빚지지 않은 사회는 없다.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정신분석 전문가라고 자처하면서 프로이트의 주장과 정반대 행위를 일삼고 있는 ‘라깡 정신분석’, ‘참나원’, ‘트랜서핑 명상센터’의 성폭력 가해자에게 권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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