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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문학사와 문단사

등록 2016-07-14 18:26수정 2016-07-14 19:22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소설 <산하>에 나오는 구절이다. 역사라는 낮의 이야기와 신화라는 밤의 이야기가 대비되는데, 어쩐지 역사보다는 신화 쪽에 애정이 실린 듯 읽힌다. 적어도 공식 기록인 역사에 비해 비공식 전승담이라 할 신화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문학사와 문단사의 관계가 역사와 신화 관계 비슷하지 않을까. 작가와 작품, 매체와 제도에 관한 공식 기록이 문학사를 이룬다면, 작품과 직접 관련 없는 문인들의 뒷이야기가 문단사로 편입되곤 한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동아일보> 문학 담당 기자 시절 낸 책 <한국문단사>가 대표적이다.

그 김병익이 최근 펴낸 문학 에세이 <기억의 깊이>와 시인 이시영의 <시 읽기의 즐거움>에는 새롭게 문단사에 등재될 법한 몇 장면이 나온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제1부가 책으로 나온 1972년 문학 기자 김병익은 작품에 감동한 나머지 이른 아침 서울 정릉 작가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따님의 말인즉 선생님이 외출하셨다는 것.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새긴 김병익은 다음날 같은 시각에 다시 댁을 찾았고 역시 같은 대답을 듣는다. 서운함과 모욕감으로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하던 그는 그럼에도 작품을 극찬하는 기사를 썼고, 얼마 뒤 작가의 식사 초대를 받는다.

박경리는 그 뒤 동아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게 되었고 담당 기자는 역시 김병익이었다. 그러나 석간 신문이 나오는 날 아침까지도 자주 원고가 오지 않았고 기자는 신문사 차로 작가의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당시 풍경 한 자락이 아프다.

“제가 박 선생님 댁에 들어가면 박 선생님은 손자를 업고 포대기를 두른 채 원고를 썼고 마침표를 찍으면 제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없이 서러운 음성으로 오열을 짜내는 듯한 원망을 풀어놓으셨습니다. (…) 집 밖에는 기관원이 서성대며 감시하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불령인 집이라 해서 위로하거나 편의를 보아주기는커녕 인사도,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위인 김지하 시인은 옥에 갇혔고 딸은 옥바라지에 바쁘자 작가가 젖먹이 외손주를 업고 원고를 썼던 것. 쌓인 원망과 서러움을 기자에게 털어놓은 것인데, 그럼에도 놀라웠던 것은 “이런 사달의 원인이 될 사위에 대한 원망은 한 번도,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시영의 책은 주로 선후배 시인들의 시에 대한 설명을 담았는데, 시인 겸 편집자로서 겪은 문단의 이모저모와 문인들에 관한 회고글도 흥미롭다. 1980년 7월31일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창작과비평>이 폐간 통보를 받자 그가 처음 전화를 건 것은 라이벌 관계였던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대표에게였다. 1985년 12월 문학과지성사 창립 10주년 기념식장에 갔던 그는 역시 김병익 대표한테서 창작과비평사 등록 취소 결정 소식을 전해 듣는다. 황석영 방북기를 <창작과비평>에 실은 일로 구속될 때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위장한 안기부 직원이 그의 집 서가에서 북한 책들을 빼내어 재판 증거로 삼았다는 일화, 서울 마포 용강동 창작과비평사 건물 1층 맥줏집을 ‘제2 사무실’ 삼아 문인들을 만났던 80, 90년대 풍경 등도 재미지다.

역사적 사실로 통용되던 일이 신화로 ‘강등’되는가 하면 신화 속 허구로 치부되던 이야기가 역사로 ‘승격’하기도 한다. 역사와 신화는 유연하게 넘나들며 서로 몸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문단 경력 반세기를 바라보는 두 원로의 회고담은 문학사와 문단사를 넘나들며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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