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김영훈 옮김, 민맥, 1989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김영훈 옮김, 민맥, 1989
트럼프의 등장과 브렉시트의 ‘주도’ 세력인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 지금 지구촌의 뉴스 메이커다. 문제는 이들이 ‘바람직한’ 사회변화의 동력이 아니라, 사실은 언제나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다. 백인 남성 노동자, 우리나라로 치면 ‘경상도 정규직 남성 노동자’쯤 될까.
폴 윌리스의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은 위 사건들에 대해 최근 <한겨레>가 인용한 학자들의 분석, 즉 “자본가의 대처 능력 상실”, “브렉시트에 찬성한 노동계급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욕하지는 말아야”와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이 책은 1977년 첫 출판 되었고 1989년 번역되었는데, 1980년대 한국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다소 놀랍다. 내가 갖고 있는 1989년판은 절판되었고 재출간된 <학교와 계급 재생산-반(反)학교문화, 일상, 저항>(이매진, 2004)을 권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차별적 문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힘에 관한 고전이자 현지 조사 연구 방법의 모범으로도 유명한 걸작이다. 부제이자 요지인 ‘노동자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는 요즘 말하는 ‘흙수저 대물림’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떻게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는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문화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저자에게 학교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제도다. 노동계급을 부모로 둔 남학생들은 권위에 반항하면서 남성 문화인 ‘사나이들’로 성장해간다. 남자아이들은 자신이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성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을, 타고난 우월성의 징표로 삼는다. 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이고 ‘계집애들’ 문화다. 남자아이들은 당장의 남성성 획득을 위해 미래를 포기한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변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왜 지배 세력에 협력하는가… 이 책은 그 주요 원인이 남성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주장을 너무나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백인/남성/노동자는 계급적 타자인 자신의 위치를 사회변화를 위한 분노로 승화시키기보다 지배계급 남성과 동일시하는 근거로 삼는다. 자신이 ‘비록’ 노동자이긴 하지만, 인종적으로는 백인이고 성별로는 남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계급적 열등감을 이주민과 여성 노동자에 대해 배타성, 우월의식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마르크스 이론의 결정적 실패 중의 하나는 성별과 인종 개념의 부재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무엇으로? 남성은 미소지니(misogyny, ‘여성 혐오’)로 단결했지만, 노동자는 인종과 성별, 국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상호작용의 산물이지만, 작동 방식은 고착적이다. 남성 노동자, 중산층 여성, 유색인 부르주아는 모두 부분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종, 성별, 계급(백인/남성/자본) 구조에 대항해 단결하면 좋겠지만 역사상 그러한 사례는 없었다. 1970년대 영국 이야기지만 영원한 함의가 있는 책이다.
백인 남성 노동자는 여성과 유색인종을 비하하고 추방하는 데 앞장선다. 그렇다고 그 이익이 그들에게 돌아갈까? 중산층 여성은 가난하고 열등감 많은 남성보다 문화자본, 경제력, 유머를 갖춘 남성을 좋아한다. 노동자 남성들은 지배계급에게 저항하는 대신 여성에게 화풀이를 한다.
백인 아내는 성공한 흑인 남성의 상징이다. 성폭력이나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는 낮은 계층 남성이나 ‘정신이상자’가 저지른다는 통념이 강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충분하다. 그래서 중산층 직종인 상담 종사자들은 여성에게 안도감을 준다.
‘라깡 정신분석’, ‘참나원’, ‘트랜서핑 명상센터’의 성폭력 사건이 믿어지지 않고, 법적 처벌이 어려우며, 지속되는 이유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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