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운명이다

등록 2016-05-20 19:09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2009
‘개인 노무현’이 불가능한 언설임을 안다. 그에 대한 모든 기억과 판단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이 분명한 사실이, 나는 가장 안타깝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자명한 역사가, 나를 좌절케 한다. 어느 세월에나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할까.

자살과 다른 죽음의 차이점은 자살이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지도 빠뜨릴 수 없다. 유언과 유서는 어떻게 다를까. 이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살은 특별해진다. 자살은 교통사고, 사고사 등으로 숨겨진 신고가 많아 정확한 통계가 어렵지만 4명 중 1명꼴로 유서를 남긴다고 알려져 있다(<자살의 이해>). 10%라는 이론도 있다. 유서가 자살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통념에 비하면, 낮은 비율 같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울증 환자도 다른 질병처럼(예를 들면, 말기 암환자) 사망 직전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 와중에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서의 길이와 내용은 다양하다. “용서하세요”, “(화장실에)들어오지 마세요”, “저는 충분히 버텼습니다”…“메리 크리스마스”도 있다. 가짜 유서(인구학적 표본에 따라 유서를 쓰게 함)와 진짜 유서를 비교한 연구가 있는데, 확연한 차이가 있다. 진짜 유서는 현실적이고 전형성을 띤다. 목적이 분명한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 관련 책에서 많은 유서를 읽었다. 일천한 독서 경험이지만 노무현의 유서는 상당한 명문에 속한다. 담백하다. 완벽하게 지쳐서 미련이 남지 않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전체적인 균형, 깔끔한 표현력, 감정과 사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증상의 전형성(“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호소(“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구체적 이유(“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성숙한 자세(“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타인에 대한 배려(“너무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소박한 요구(“화장”, “작은 비석”). 그가 겪었을 고통을 감안하면 놀라운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해석을 요하는 부분은 “운명이다”(노무현 자서전 격인 동명의 책도 있다). 당일 <비비시>(BBC) 뉴스는 “It is fate”라고 보도했다. 이 단어는 주로 좋지 않은 일에 사용한다.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와 역행하는 불가항력으로 팔자, 숙명, 운, 초월적 힘, 심지어 미신으로 간주된다. 운명론은 순응, 허무 등으로 오해받는다. 반대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지나친 도전론도 만연해 있다.

“운명이다”는 두 경우 모두 아니다. 그는 구조적 문제와 본인의 캐릭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 상황은, 이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정세였지만 그는 (우울증 증상으로 인해) 불행한 미래를 확신했다. 그 요약이 “운명이다”다.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교통사고나 암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책임감이 높고 뻔뻔스럽지 않으며 타인에게 분노를 전가하지 않는 성격에서 흔하다.

운명은 우주 혹은 세속의 힘이고, 개인의 삶은 그 힘에 종속되는가? 그렇지 않다. 운명은 권력을 탈정치화시킨 표현에 불과하다. 운명은 구조의 힘에 대한 나의 대응(re/action)이다. 그것이 균형인 경우는 드물다. 극단으로 기울어질 때 개인은 생사의 기로에 선다. 자살, 타살 여부는 부차적이다. 즉 모든 자살은 사회적(타살)이다. 대개 구조가 개인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팔자를 타령한다. ‘운명을 극복’한 경우는 복잡한 세상의 우연 덕분이다. 이 과정에서 ‘승패’와 무관하게 악의 그물에 걸려 몸이 헌신(獻身)될 수 있는데, 소위 “역사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운명이다”는 구조, 당시 정권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그는 구조주의자(운명론)도 개인주의자(의지론)도 아닌 구조를 넘어서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지 말아야 했다? 우리는 생사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우리는 정말 ‘정치 양극화’에 반대하나 [강준만 칼럼] 1.

우리는 정말 ‘정치 양극화’에 반대하나 [강준만 칼럼]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2.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윤석열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3.

윤석열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계엄부터 재판관 흔들기까지…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4.

계엄부터 재판관 흔들기까지…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5.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