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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

등록 2016-05-13 19:44수정 2016-05-13 19:4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국여성인권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엮음
한울, 1999
대학 시절 내내 대자보를 썼다. 6년 만에 학교를 졸업한 후 그 다음날 여성단체에 취직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또 대자보와 시위용 피켓, 플래카드를 만들어야 했다. 1992년 2월,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다. 사실 이 법은 제정될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에도 법은 있었다(‘정조에 관한 죄’). 성폭력은 법적 근거가 없어서 처벌되지 않는 범죄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성에 대한 극단적 차별이 법 위에 군림하는 한, 여성에게 세상은 무법천지다.

법무부 산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에 따르면, 여전히 성폭력 신고율은 2~6%에 불과하다. 최근 보고는 아니지만 성폭력 신고율이 낮은 것은 세계 공통이다. 낮은 신고율, 그보다 더 어림없는 기소율, 더욱 어려운 유죄 판결률을 고려하면 실제 성폭력 발생이 처벌로 연결되는 비율은 소수점 한참 이하다. 집단 성폭력이나 유아 성폭력처럼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성폭력조차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집중취재)>는 성직자의 어린이 성폭력 실화를 다루고 있는데, 성폭력은 사법체계가 아니라 기자, 지역사회, 피해자가 수사해야 하는 일임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왜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피해자와 ‘엄청난 사명감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가? 그 이유는 성폭력 사법처리 과정이 다음과 같은 전형을 밟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어렵게 신고하면 기소 단계에서 기각, 판결 단계에서 무죄가 된다. 그 다음 순서, 피해자는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고 가해자는 피해자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피해자가 가해자, 용의자가 되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가장 좌절을 주는 성폭력 사례는 성직자, 의사, 교사, 상담가, 법조인 등 특수 직업 종사자, 즉 가해자의 업무가 시민 보호인 직종의 경우다. 이 영역은 철벽이다. 숨겨진 범죄, 처벌받지 않는 범죄, 피해가 2차, 3차로 이어지는 범죄. 내가 피해자라면 평생 분노와 우울증에 시달리느니, ‘자객’(刺客)이 되겠다(실제 권투를 배운 적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실명 공개다. 가해자들은 성폭력을 범죄가 아니라 도덕적 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명 공개를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사회가 파헤친 것은 “ ~ 사건”처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이름이었다. 정치인이나 신창원 같은 유명 용의자의 경우 유죄 확정 전이라도 신상이 공개되는 경우가 흔하다. 성폭력은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성별 권력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범죄다. 실명 공개는 전자팔찌, 화학적 거세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미국의 메건 법(Megan’s Law)은 성범죄와 관련하여 기소된 적이 있는 사람의 이름은 물론 나이, 주소, 전화번호, 사진, 직장, 자동차 번호까지 공개한다. 1994년 뉴저지 주에서 일어난 7세 여아 성폭행 살해사건을 계기로 제정되었다. 메건은 그 소녀의 이름. 1996년 연방 법률로 제정된 이후 미국 전역에 적용되고 있다. 인터넷과 전화로 누구나 성범죄자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얼마 전 상담, 정신분석, 명상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한 남성 세 명이 다수의 여성 내담자를 성폭행해온 혐의가 드러났다. 이 중 한 명은 현재 고소와 피고소가 진행 중이다. 다른 두 명은 고소되지 않은 채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은 실태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사이비 상담소’를 찾고 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남성 성치(性治)국가다. 폭력이 아니더라도 상담자는 내담자와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기본적인 직업윤리다. 이들의 실명 공개를 요구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오늘의 책 <한국여성인권운동사>는 ‘이 글’의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버전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 치열한 투쟁, 쟁점도 그대로다. 일본어로도 번역되었고 여성운동 서적으로는 드물게, 출간된 지 18년이 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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