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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머니 안의 송곳

등록 2016-04-15 19:2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002
주머니 안의 송곳,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진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고사성어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避隱)’편은 숨어 사는 승려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중 고승 연회(緣會)의 사연을 읽다가, 내 몸에 정박했던 세월호가 염두에 섰다.

그는 “벼슬로 나를 얽매려는” 왕의 부름을 피해 은신처마저 떠나려 한다. 그러자 “숨어사는 이곳에서도 이름이 높은데, 여기나 거기나 어차피 매명(賣名)은 마찬가지”라는 현자의 말을 듣고 국사(國師)가 된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저자 거리에 가까우면 오래 숨어살기 어렵고 /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은 삐져나와 감추기 어렵다네…”(553~555쪽)

유래는 사마천의 <사기>다. 조(趙)나라 재상(宰相) 평원군(平原君)은 자기 집 식객 중에서 전쟁에 데리고 나갈 20명의 수행원을 뽑고자 하였다.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지원하자, 평원군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드러나는 법인데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소”라고 거절했다. 모수는 “저를 주머니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넣어 주신다면 끝뿐만이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라고 대꾸한다.

뛰어난 사람, 주머니 안의 송곳의 비슷한 말은 군계일학, 발군, 출중 등이다. 낭중지추에서 송곳은 ‘내부’에 있지만 나머지 세 단어에서 송곳은 ‘무리(群, 衆) 속’에 섞여 있다. 즉 후자는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뛰어남을 의미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은 비유다. 평원군도 “마치”라는 표현을 썼다. 비유는 다른 해석, 번역이 가능하다.

송곳이라는 우리말 어감 때문인지 이 말은 본뜻과 달리 견딤과 파열의 긴장이 있다. 송곳은 연장통에 있어야지 헝겊 주머니에 넣은 것 자체가 이미 문제 아닌가. 주머니는 찢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다. 주머니 안의 송곳이 재능이 아니라 고통이나 슬픔이라면? 주머니가 몸이라면? 낭중지추가 슬픔이 몸 밖으로 나온다는 뜻이라면?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이 말을 “눈에 띈다”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부에서 금기된 것, 어쩔 수 없는 것, 이물, 내보내야만 살 수 있는 것들이 나오려고 몸부림쳐서 기진한 몸의 표현이다. 감당하지 못하는 몸은 터지거나 새거나 우리가 ‘혐오’하는 상태로 뿜어져 나온다. 몹시 아프다. 몸의 안팎이 뒤집어지는, 사느냐 죽느냐의 고통이다. 구토, 두피의 붉은 점상들, 한없이 흐르는 체액. 몸에 그만한 양이 있었나 싶은 것들이 나온다. 한 달 이상의 하혈,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콧물, 멈추지 않는 가래, 눈물에 부어 보이지 않는 눈동자…. 아, 언제 멈출 것인가. 이런 몸의 고통은 사회적, 관계적 문제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라 의료적 처치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다.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몸에 망자가 상주한다. 몸에서 내보내야 내가 살지만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러기 싫다. 나는 슬픔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도 탈상(脫喪)은 없다. 얼마 전 존경하는 분의 모친상에 다녀왔다. 원래 장례식, 결혼식에 일절 가지 않는 나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어이없는 말이지만,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엄마만 죽는 게 아니구나. 다른 사람의 엄마도 죽는구나. 내 어머니나 그분의 어머니나 비록 고통스러운 질병이었어도 연로하셨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그런데도 나는 5년째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지 못하고 삶은 계속 유예 상태다. 미래도 현재도 없다. 내가 제일 슬프다. 나만 당사자니까. 평범한 생로병사의 죽음도 이러한데 세월호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의 죽음, 게다가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국가의 폭력이었다. 죽음의 이유와 과정도 밝혀지지 않았다. 슬픔이 진실을 결정하지만, 자녀와 친구를 잃은 그들의 몸은 어떠할까.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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