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가정폭력의 허상과 실상>, 리처드 겔즈 지음
이동원·김지선 옮김, 길안사, 1998
<가정폭력의 허상과 실상>, 리처드 겔즈 지음
이동원·김지선 옮김, 길안사, 1998
올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내게 인상적인 장면은 조 바이든 현직 부통령의 등장이었다. 그는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소개했다. 가장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국가 최고위 지도자가 “강간(rape culture) 근절”을 호소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폭력, 가정폭력(정확한 표현은 ‘아내에 대한 폭력’)은 가장 오래된 인류 역사다. 가장 광범위하고 빈번하게 행해지지만 언제나 사소한 문제로 취급된다. 이 책은 가정폭력(원제 Intimate Violence in Families, 1997)의 실태에 집중하고 있어서 여성뿐 아니라 노인, 아동, 동성애 가족 등 구성원 전체를 다루고 있다. 저자 리처드 겔즈는 ‘평범한’ 남성 사회학자였는데 가정폭력을 연구하다가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하다가 “가정 내 성역할과 인권”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당시 겪은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나는 미국의 자료에 압도당했다. 1960~70년대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의 산물이다. 여기서 첫 번째 좌절.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피해 당사자도 듣는 사람도 믿기가 어려워, 면담 과정이 쉽지 않다. 피해 여성은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의 격차(누가 내 말을 믿을까?) 때문에 스스로 자아를 조절한다. 청자에 따라 선택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타인에게 어떻게 설득할까.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봐 경미한 사례만 간략하게 인용하고 분석에 집중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장이 심하다”, “주부생활(여성잡지) 표절한 거 아니냐”는 독후감을 말할 때, 두 번째 좌절이 왔다. 그 밖에 “어머니가 맞고 사시냐”, “매 맞는 남편도 있다”, “폭력가정은 극소수다” 등 여기 다 적을 수 없는 내용이 세 번째 좌절이다. 왜 여성의 경험을, 말을, 생각을 믿지 않을까.
연구자가 남성이라면, 피해자가 남성이라면 이런 모욕을 당했을까. 나는 평생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성학 생존자’가 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인식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겪은 사람을 포함, ‘아무도 모른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은 새로운 지식 앞에서 곧바로 통념으로 전락한다. 학문의 자유는 그 직전까지만 필요할 뿐이다.
이 책에 수시로 등장하는 겔즈, 스트라우스, 도바쉬의 연구는 미국 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지만 그들의 고민도 비슷하다. “강도, 교통사고로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여성보다 구타로 인한 상해로 치료받는 여성이 더 많다. 지난 5년간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여성의 수와 맞먹는다. 1938년 창립된 미국 ‘소아마비 구호 모금 운동본부(March of Dimes, 누구나 적은 돈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임신 중 구타가 선천성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원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이런 숫자들은 축소 보고된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출처를 제시하기 힘든, 옹호 자료(advocacy statistics)라는 사실이다.”(12~13쪽)
정확한 통계에 근거한 대책? 이는 인과관계가 뒤바뀐 사고다. 문제가 아니라고 보니까 조사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통계가 부실한 것이다. 원래 팩트는 의제 설정 과정의 산물일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학문의 자유? 여성 폭력에 관한 한, 자유(=가부장적 통념)보다 학문의 발전(=기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간혹 방언을 중얼거린다.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모르면 가만있어, 하긴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존재지.” 완전범죄는 가능하다. 범인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피해자가 보이지 않을 때다. 사회적 약자가 구타당하면 그렇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