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우울의 늪을 건너는 법>, 홀거 라이너스 지음, 이미옥 옮김
궁리, 2003
<우울의 늪을 건너는 법>, 홀거 라이너스 지음, 이미옥 옮김
궁리, 2003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그럴까.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심란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악랄한 이데올로기.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삶과 성취가 있다는, 생애주기 개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질병 때문에 인생의 공백이 생긴 경우 누굴 탓하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와타나베 겐은 승승장구하던 시절 백혈병 진단을 받고 첫 단독 주연작을 포기했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그의 진정성과 열정은 젊은 날 투병의 영향일 것이다.
다른 질병과 달리 우울증을 앓는 이들은 타인이 보기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일 뿐,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간혹 극심한 우울증 환자 중에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울프, 헤밍웨이…), 정작 본인은 인생의 무의미에 지쳐 자살한다. 자살은 ‘예술가의 고뇌’가 아니라 신체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이들의 자구책이다(예술가보다 사회적 약자의 자살이 훨씬 많음은 물론이다). 그들의 작품은 투병 과정이었을 뿐이다. 우울증은 의사, 환자, 사회 모두가 인식하기 어려운 병이다. 외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울의 늪을 건너는 법>은 우울증 환자에게 고립감을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벗이지만, 독일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의 극복기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경험은 아니다(예를 들어 멋진 자동차 이야기나 독일의 의료 체계). 인간의 언어는 고통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20년을 견딘 사람답게 명언이 즐비하지만, 저자처럼 ‘완치’(우울증을 평생 관리해야 하는 상태)되는 사례는 드물다. 사실은 ‘건널 수 없는 병’이다. “매순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도록 평생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93쪽)
나는 매년 이 책을 읽는다. 곱씹는 구절도 같다. “…난 다시 부담을 느꼈고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는데, 이미 내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나섰으며 몇몇 친구들은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나는 거의 10년이나 뒤처졌다.”(70쪽)
우울증 환자의 낙오자 정서는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다”(108쪽)는 사고에서 온다. 원래 시간은 객관적이지 않다. 행복한 시간은 짧고, 괴로운 시간은 길다. 우울증을 앓는 시간은 둘 다 아니다. 쉽게 말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므로 인생과 시간은 동반자가 아니다.
위 구절은 평범하다. 아니, 현실 왜곡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서른 전후에 취직과 결혼을 모두 달성(?)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결혼은 자발적 거부가 태반이다. 나이에 맞는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아예 불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슬프다. “나는 뒤처졌다”. 3포~9포, 인간관계 포기, 취업 준비만 몇 해, 만년 과장, 캥거루족…. ‘제때 안 풀린 인생’ 많다. 억울한 감옥살이, 지혜 없이 방황했던 시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망친 경우, 의미 없는 인간관계에 집착했던 시간, 한창 일할 나이에 찾아온 질병….
“뒤처진 인생”이란 결국 타인에게 뒤처졌다는 얘기인데, 다른 이들도 똑같이 뒤처졌으므로 덜 괴로워해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당대 자본은 나이에 맞는 지위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지위를 초과 달성한 이들을 원한다. 어차피 웬만한 사람은 다 ‘루저’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마스터플랜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남들 보기에?” 인생 진리 중 하나는 남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과의 투쟁이다. 10년을 여관방에서 시나리오만 쓴 영화감독, 기약 없는 무명 시절을 견딘 배우, 20년 습작 시간을 거쳐 마흔에 데뷔한 작가….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나는 조금 태평해지기로 했다. 올해 내 노선은 남들이 뭐라든 독하게 ‘마이 웨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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