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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동무는 괴로운 존재요…우정은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등록 2016-01-15 19:07수정 2016-01-15 21:0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달을 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지음, 정음사, 1948
어떤 소설가는 “절망이 희망을 품고 있다”고 썼다. 친구들은 이 말이 좋다 한다. 하지만 나는 절망이 너무 두꺼워서 희망의 씨앗이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싶다. 씨앗 혼자서 통곡하고 있지 않을까.

작년 12월31일, 밤. 가는 비가 내렸다. 나는 전철역 출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치여 가며 10년 동안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절교를 통지받았다. 곧바로 근처 대학 도서관에 갔다. 그 와중에 마감 원고 60매를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택시 할증이 풀리는 새벽 4시, 차 안에서 울었다. 그날은 인간관계는 엉망이고 일중독인 내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사람에게 겁먹고 일로 도피하는 지루한 일상과 노동. 새해부터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교회’에 나가는 심정으로 아는 중고서점으로 출근하고 있다. 동생이 비웃는다. “많이 달라졌네.”

뜻밖에 윤동주를 발견했다. 집집마다 있을 것이다. 나도 다섯권쯤 갖고 있다. 이 책은 1948년 초판, 1980년 중판이다. 하드커버에 “미발표 전작품 수록!”이 적힌 띠지, 비닐 포장까지 갖추었다. 책갈피에는 마르고 말라서 글씨가 비치는 꽃잎이 있다. 함께 실린 문익환, 백철, 동생 윤일주의 글은 숨죽여 울며 읽었다. 일본인 간수는 사망 직전 “동주 선생”이 무슨 뜻인지 모를 큰소리를 외쳤다고 한다.

1917년에서 1945년까지 스물일곱의 생애. 스물한 살에 쓴 산문 ‘달을 쏘다’를 읽고 나의 청승과 그의 빛나는 고독의 차이를 깨달았다. 마음의 능력이 그것이다. 윤동주의 마음에는 진짜 하늘과 바람과 별이 있었다. ‘달을 쏘다’에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 같은 산문, 전재하고 싶은 산문이다.

“바다를 건너 온 H君의 편지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사이의 感情이란 微妙한 것이다. 感傷的인 그에게도 必然코 가을은 왔나 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中 한토막, ‘君아 나는 지금 울며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人間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情의 눈물, 따듯한 藝術學徒였던 情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句節이 있다. ‘당신은 나를 永遠히 쫓아버리는 것이 正直할 것이오’ 나는 이 글의 뉴안쓰를 解得할수 있다. 그러나 事實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이 없고 설은 글 한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건대 이 罪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紅顔書生으로 이런 斷案을 나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存在요 友情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이 말을 反對할者 누구랴. 그러나 知己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 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204~206쪽, 한자는 원문 그대로)

짧은 글에 정중동(靜中動), 단호함과 서운함, 회자정리를 받아들이는 담담함, 고요한 외로움, 아쉬울 것 없는 삶에 대한 자신감을 단정하게 적었으나 그도 화가 난 듯하다. 그의 친구는 크게 상처받았나 보다. 동주도 억울했는지 “넌 지금 울지만, 난 잘못한 일이 없다”고 썼다.

인간관계처럼 어렵고 피곤한 일이 없다. 문제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다. 관계는 생명이며 한 인간의 총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를 포함 인구 태반이 관계 무능력자다. 이 경우는 운이 좋았다. 상대방이 “나를 영원히 잊으라” 고지했고 시인은 돌팔매질로 분을 풀었다. 이런 상처는 짧아야 한다. “돌을 찾어 달을 向하야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痛快!… 훌륭한 활을 만들어…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武士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는 ‘말’로 끝나야 한다. ‘양다리’, 잠적, 돈 안 갚고 도망가기 등 ‘사건’으로 끝나는 것은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별로 심오하지 않다. 이용하려고,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귀찮아서….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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