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김재명 지음, 지형, 2005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김재명 지음, 지형, 2005
며칠 전 ‘여성, 평화, 환경’의 연관성을 공부해보자는 무모한 소모임이 있었다. 세 주제의 공통점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총체적 인식론이라는 점, 사전식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점, 우리 사회에 간절한 언어지만 가장 연구 집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글 중간에 무례한 사족이지만, 간혹 내게 “여성학자냐 평화학자냐 변절자냐”고 심문하는 이들이 있는데, 여성학과 평화학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여성주의 시각의 평화를 지향한다.
모임이 끝나고 이 책이 생각났다. 부제는 ‘국제분쟁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으니 저자의 입장이나 지역 상황도 변했겠지만 앞선 문제의식은 여전히 돋보인다. 저자는 “나름대로 안정된 직장”에 다니다가 1996년부터 분쟁지역 취재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저서와 집필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전문가다. 읽는 것도 이렇게 괴로운데 쓰는 사람은 어땠을까. 저자는 분쟁지역에 입국하는 과정을 ‘고문’이라고 표현한다. 취재는 또 다른 전쟁.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증언하는 임무는 입국 절차를 넘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영화 주인공 게리 쿠퍼는 없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나 <블랙 호크 다운> 같은 영화는 정세를 알고 나면 보기 힘든 텍스트다. 일단 나는 전쟁, 테러, 내전, 분쟁(armed conflict)의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12개 지역의 상황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정의의 ‘전쟁’과 자살 폭탄 ‘테러’의 위계는 누가 정하는가. 카슈미르, 코소보, 관타나모 지역 주민에게 국경의 의미는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봉쇄 그리고 가정폭력과 10명이 넘는 아이를 낳는 전통에 시달린다”(74쪽), “내전(종족 분쟁, 대규모 강간)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보스니아에서는 주택의 40%가 무너지거나 불에 탔다”(131쪽), “시에라리온은 내전과 에이즈 때문에 평균 연령이 34.2세다. 영국 식민지 시절 육군 상병이었던 ‘포데이 산코’라는 남성은 1991년 ‘혁명’인지 ‘내전’인지를 일으켰다. 산코의 부하들이 도끼로 주민들의 손목을 자르는 일이 성행했다. 손이 없다면 투표를 못할 것이라는 ‘전술’의 일환이었다”(265쪽).
사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착각으로 제목을 잘못 읽어서다. “나는 평화를 기원하기보다 목숨 걸고 싸우는 약자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연대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18쪽) 평화는 투쟁이라는 저자의 시각이 반가웠다. 내가 오인한 제목은 “평화를 믿지 않는다”였다. 나는 평화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평화?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평화는 인간의 심장이 꺼질 때서야 찾아온다.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이의 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 전쟁과 평화는 같은 말이다. 평화의 어원은 침략자, 강자의 승리를 뜻한다. 공격 후 민사 작전, 다시 말해 점령 지역을 평정(平定)하여 반란을 진압한다는 뜻의 ‘pacify’에서 ‘peace’가 나왔다. 우리말의 평화(平和)는 1889년 창립된 ‘일본평화회’의 기관지 <平和>(へいわ·헤이와)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평화가 peace보다 낫다. 하지만 ‘화(和)’가 온 누리에 ‘평(平)’할 수 있을까.
전쟁은 없지만 굶주림과 폭력이 만연한 상태, 가진 자의 마음의 평화, 여성의 목소리는 불편하다는 진보 남성이 많은 사회를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 모임엔 있었다). 평화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다.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위로. 나는 그런 평화를 기원한다. 그런 평화는 믿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평화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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