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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완강한 묵살

등록 2015-12-11 19:13수정 2015-12-11 21:0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아베 일본 총리 부부는 자녀가 없다. “다음 총리는 누가 하지?” 동아시아 3국(남북한,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세습 체제가 워낙 강고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황당한 말이 나왔다. 친구가 ‘걱정’ 말라며 고이즈미 전 총리 아들이 준비 중이란다.

가족, 금수저, 흙수저… 김대중-이회창 후보가 대결한 15대 때부터 18대(박근혜-문재인)에 이르기까지, 가족제도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좌우한 핵심 요소였다. 이회창씨 아들과 사위는 모두 군대에 가지 않았고, 18년간 통치했던 전직 대통령의 딸은 그 사실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를 분석한 주장을 접하지 못했다. 여성주의는 사회 구성 요소로서 성별 체제(gender system)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인식론이다. 어떤 사상에 대한 무지와 무시는, 묵/살(默殺)이라는 두 음절로 요약할 수 있다. 침묵시키고 없애버리는 것.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고전이다. 그만큼 한계와 비판도 많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여성 친화적’인 텍스트다. 주요 내용은 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이행, 정착, 축적, 부의 탄생, 이성애 가족, 여성에 대한 성적 통제, 부의 세습, 관리 체제로서 국가의 필요이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이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제목 세 가지 중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주제로 읽을 수 있다.

남자들만 나오는 동성사회성(同性社會性) 젠더 영화 <내부자들>에 변호사로 개업한 전직 검사(조승우)의 통화 장면. “간통죄 폐지된 거 몰랐어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그거 제가 없앤 거 아니라니까. 에이!” 나도 많이 듣는 말이다. 일부일처제는 역사상 어느 시대와 장소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다. 축첩, 성구매, 혼외 사랑 등이 이를 ‘보완’해왔다. 남녀 경제력이 천지 차인데, 사랑만 평등한 일부일처가 가능할까. 아직도 간통죄가 가족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7장을 읽기 권한다(“켈트인과 게르만인의 씨족”). 여성주의를 제외하면, 가족제도에 대한 이만한 끔찍한 비판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성애 가족 제도에 대한 엥겔스의 무지였다. 이는 인종, 공간, 언어 이론 등과 함께 혁명 이론으로서 결정적 오류였고 실제 실패 원인이었다. 사랑에 기초한 결혼? 이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유물론자지만, 유독 성과 사랑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85쪽). 앎은 이해관계다. 몰라도 된다, 이게 기득권이다.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묵살이다.

엥겔스는 이 책이 영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모오간(모건)의 저작, <고대사회>를 보충하는 차원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아예 책 표지에 “모건의 이론을 바탕으로”라고 적시했다. 그는 당시 독일의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자본론>을 맘대로 갖다 쓰고 크게 도움 받았으면서도 “완강히 묵살”(5쪽)했던 것처럼, 모건의 책도 그런 취급을 받았다고 서문부터 결론까지 내내 울분한다.

책을 다시 읽으면 이외의 구절이 본질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책 내용이 널리 알려진 편이라, 나는 엥겔스가 분노한 “묵살”이라는 상황이 흥미로웠다. 남의 것을 훔치고 남의 노동을 착취하고 남의 인생을 망쳐놓았으면서도, 그럴수록 상대를 미워하는 심리. “지배계급은 자기 죄악을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미화하거나 부인한다. 자신은 은인이다. 민중이 저항하면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한다”(199쪽). 그들은 자기 죄악을 묵살한다. 몰라서? 뻔뻔해서? 켕겨서? 자존심 때문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지배세력만 그럴까. 마르크스주의자,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식의 전제는 젠더다. 동시에 여성주의는 이성애 제도, 인종, 계급 문제와 얽혀 있다. 모든 언어는 전제의 전제, 그 전제의 전제가 있다. ‘지적인 대화’란 최종 산물(?)인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전제들의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심사하는 권력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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