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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왜 나를 만들었나요?

등록 2015-12-04 19:3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정혜경·신경숙 옮김, 파피루스, 1993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다.” 아침형 인간의 원조다. 성취와 생산력이 최고 가치인 근대적 인간, 한국말로는 새마을운동가(家)다. 이들은 새벽종을 울리며 남들까지 깨운다. 여기 등장하는 일찍 일어나는 새에게 지혜나 관용, 사유까지 바랄 수는 없다. 무조건 부지런하면 최고다.

어쨌든 이는 알다시피 새의 관점이고 벌레의 입장에서는 지옥의 현실이다. 쉘 실버스타인의 이 잠언은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로 끝맺는다. 하지만 생사가 걸린 마당에 늦게 일어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벌레는 자연사하기 어렵다. 새에게 잡아먹힐 확률이 높다. 오래 살려면 새가 볼 수 없는 곳에 은둔하거나 자는 척, 죽은 척 하거나 소금 뿌린 채소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 저항은커녕 눈에 띄는 것조차 위험하다.

간혹 하루 종일 누워 지내는 이들을 본다. 혹시 벌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은둔 행동 중 하나가 아닐까. 눈물이 난다. 이 기막힌 운명. 억울함. 가장 분한 것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 내 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주에 던져졌다.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인과론적 사고에서 이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말과 부대끼며 산다. “버러지 같은/보다 못한 인생”,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그게 부모 앞에서 할 말이냐!” 선대의 생명(부모)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의지 무관 탄생 - 인생은 고해, 죽도록 고생 - 죽음.

여기 그런 인생이 또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처럼 사연 많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원작보다 영화가 더 유명해서 ‘괴물’을 만든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작가 혹은 괴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정작 괴물은 이름이 없다. 작중 화자도 여러 명, 복잡하다. 이 작품은 1797년 영국에서 윌리엄 골드윈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딸, 메리 셸리가 스무 살에 완성한 작품이다. 요즘 말로 하면, “태어났더니 부모가 누구더라”는 식이다. 울스턴크래프트. 근대 여성주의 역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여성 권리의 옹호> 등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메리를 낳은 뒤 산욕열로 열흘 만에 사망했다.

대개 이 소설은 한글판 부제대로 “창조의 신비를 엿본 과학자의 몰락”으로 읽힌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 근대과학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빚어낸 괴물, 인간의 무책임과 오만을 경고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외친다. “많은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 나는 그 이상을 이룰 것이다. 앞서 찍혀진 발자국을 따라 새 길을 개척하리라. 미지의 힘을 발굴하고, 창조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세상에 밝히리라”(73쪽). ‘근대당 선언’이 있다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의 삶은 비참했다. “나를 만든 당신까지 나를 경멸하고 미워하십니까”, “내가 이토록 잔인해진 것은 억지로 내게 정해진 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 때문이요”(226쪽). 괴물은 자신의 조물주 프랑켄슈타인을 죽인다.

새와 벌레는 자연의 이치이고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이를 거스른 관계가 아니다. 같은 이야기다. 벌레와 ‘괴물’ 모두 만들어진 것. 그러므로 그나마 주어진 삶의 질이 문제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근대에 이르러 조물주는 신에서 ‘사회’로 변했을 뿐이다. 피조물의 진저리나는 삶은 그대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사람, 사상, 조직 등 모든 유기체가 영속하는 원리는 만들어진 자가 만든 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사라짐 자체여야 한다(살해). 고통 때문에 스스로 사라져서는(자살) 안 된다. 너를 만든 자(子)를 존경하라? 자살은 죄다? 작년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 1450명, 이 숫자를 그대로 믿는 이들이 있을까.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해석은 조물주가 누구냐에 집중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슬픔이 아니라 추물의 공포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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