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리부팅 바울>, 김진호 지음, 삼인, 2013
<리부팅 바울>, 김진호 지음, 삼인, 2013
바울은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제2성서(신약성서) 27개 텍스트 중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이고, 그의 서신은 1세기 말경부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였다. 바울이 고린도 시(市)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고린도전서 9장 16-27절은, 기독교 신앙을 떠나 많은 이들에게 서원(誓願)의 글이 될 만한 명문이다. 나 또한 민망하지만 그리운,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으므로 새로운 맹서를 소망한다.
‘훼손’을 무릅쓰고 적어본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받을 삯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중략)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최근 출간된 신학자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과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은 다방면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거대 서사라는 점에서 결국 묵시록적인 여운을 남긴다(특히 <호모 사케르>). 물론 지구는 절망적이다. 하지만 똑같은 절망은 없으며 절망을 대면하는 시선 역시 동일하지 않다. ‘서울’에서 쓴 <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의 저자 김진호는 절망적이기보다 현실적이다.
그는 서구 지식인이 여전히 “지구적(고린도? 파리?) 사고와 지역적(서울?) 실천”이라는, 즉 자기들은 글로벌이라는 보편과 특수의 이분법에서 얼마나 벗어나기 힘든가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나는 정치와 사회운동, 학문은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겸양과 자기 변화, 궁극으로는 헌신으로서의 변신이다. 타인 되기. 나는 5장 “낯선 바울의 타자의 정치학 - 고린도전서 읽기”에 집중한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서 관심사가 고정되어 있다. 나는 ‘될 수 없는 자’(139쪽)가 되기 위한 삶에 집착한다. ‘될 수 없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 - 실패와 고통, 깨달음 -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타자)이 되는 삶. 바울은 ‘주인, 이스라엘인, 남자’가 되기를 버리고 ‘여자와 노예’가 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타인이 되고자 해도 진정 타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요지는, 바울의 제안이다. 저자 역시 그러하다.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탈전통)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윤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내가 타인이 되고자 함은 ‘복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이다. 타인을 수용하고 온전히 이해하고 이해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변형될까. 그 상태를 살고 싶다. 타인이 내게 들어오기는 쉽지 않다. 그 반대는 조금 수월하다. 나를 없애버리면 된다. 타인의 몸에 들어가, 그들이 자신의 전사(前史)를 인식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그녀 혹은 대상에게 헌신하는 기생자가 되고 싶다.
‘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본질이자 으뜸 가르침(‘宗敎’)이요 마음을 다한 정치이다. 진정한 믿음은, 비슷하지만 아닌 것, 즉 사이비(似而非)다. 최선의 사이비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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