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남성 페미니스트>, 톰 디그비 엮음
김고연주·이장원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4
<남성 페미니스트>, 톰 디그비 엮음
김고연주·이장원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4
남성 페미니스트는 부르주아 출신 마르크스주의자나 백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가처럼 당연히 존재한다.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보면,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타입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성별 제도를 구조적인 억압으로 인식하고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군대의 남성성에 반대하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남성, 결혼 제도가 국가의 복지 정책을 대신하고 있다며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 시간 배분과 순서에서 가사노동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는 남성, ‘작은’ 실천이지만 집에서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여성주의를 진보나 정치적 올바름의 한 종류로 보고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다. 심한 경우, 자기보다 페미니즘 지식이 없는 여성을 무시하고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남성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주의 ‘완장’을 이용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페미니스트 여성과 연애하기 위해 여성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최악은 ‘불성실한 루저’인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하는 경우다. 이들은 ‘빈대’를 연대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연애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고학력 중산층 페미니스트에게 접근해 자신을 “남성다움을 포기한 올바른 인간”으로 고해하고 상대방의 자원(돈, 지식, 섹스, 보살핌…)을 착취한다. 분업(‘양다리’)을 하는 남성도 심심찮다. 돈과 지식은 페미니스트에게서, 진짜 연애는 ‘일반 여성’과 한다.
이 책의 제목은 <남성 페미니스트>(Men Doing Feminism). 하지만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성별(gender)이 얼마나 ‘골치 아픈’ 제도인가를 보여주는 ‘젠더 트러블’로 읽는다. 전공자들의 좋은 번역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의외로 이론적’인 책이기도 하다. 의학, 인류학, 철학… 재미있고 풍요로운, 읽는 이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지성의 세계가 펼쳐진다.
여학생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남성 교수, 남성이 몸과 일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페미니즘 사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 여성주의는 남성에게 유리한가? (반대로) 남성은 여성주의에 유리한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전환한 남성의 정체성 이슈 등을 담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성별은 ‘남녀’라는 한 개의 양성 묶음이 아니라 여러 개(gender/s)라는 자연의 이치를 증명한다. 인간을 남녀로만 구분하려는 정치, “태초에 억압이 있었다”.
나는 특히 헨리 S. 루빈의 “(성전환자)남성처럼 글읽기”가 좋았다. 인간의 성이 뭐 그리 대단한 차이라고! 편견과 몰이해라는 강펀치를 매일 맞으며, 사람들에게 수용되기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의 불면의 밤이 남일 같지 않다.
이 책은 여성주의 입문서인 동시에 고전이다. 나는 그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성주의자로 살려면, 뇌혈관이 터지기 전에 ‘성불’(成佛)해야 한다. 24시간 복잡한 현실, 모순의 사유가 기다리고 있다. 최근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 “게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없다. 여성주의와 자신의 관계 맺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든 앎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과 인식자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묻혀진 질문에 왜 / 내가 비명으로 답해야 하는 걸까 /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가는 두려움…”(자비에드 빌라루티아,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페미니스트, 162쪽).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핵심은 남성다움보다 정의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183쪽).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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