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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까지 살고 싶습니다

등록 2015-11-13 19:26수정 2015-11-14 09:1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인간을 넘어서>, 나카무라 유지로·우에노 치즈코 지음,
장화경 옮김, 당대, 2004
흔한 일이건만, 최몽룡씨의 기자 성추행 사건을 접하고 각별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가해자가 나이 든 남성이기 때문일까. 게다가 “국사를 쓰겠다”고 나선? 여러가지 혐오감이 겹쳤지만 내가 ‘노추’(老醜)의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 듦에 대한 혐오는 근원적으로 죽음의 공포 때문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속도주의는 노인을 사회적 부담으로 간주한다.

최근 한국 사회 외모주의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은 노인이 아닐까. 노동시간은 짧아지고 평균 연령은 길어진 고령화 사회. 모두가 “곱게 늙자”고 외치고 있다. ‘곱게 늙음’은 성형외과 문전성시부터 “인생 이모작”, “꼰대 되지 않기” 등 노인형 자기 계발까지 다양하다. 동안 만들기는 온 나라의 운동이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일, 운동, 인간관계를 성실히 가꿔가자는 총체적인 ‘웰 에이징’이 제시되고 있다. 여든이 넘어서도 수없는 걸작을 내는 예술가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나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86살)의 팬이다.

그러나 다른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죽을 시기를 정하고 곡기를 끊거나(스콧 니어링, 100살) 아파트에서 투신하거나(질 들뢰즈, 70살) 작가 복거일씨처럼 암 진단을 받았지만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자살은 생명 경시고 철학자의 자살은 실존적 고뇌인가. 논점은 자살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나이다. 노년과 10대의 자살은 다른 연령대만큼 비난받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선택해도 되는 것이다’.

어쨌든 장수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과 지향도 변화하고 있다. 이 책은 1989년 일본의 석학, 나카무라 유지로와 우에노 치즈코의 왕복서간집이다. 원서(‘人間’を超えて)는 ‘인간’을 강조한다. 부제는 “이동과 착지”. 나이 듦을 중심으로 인간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공부를 좋아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지적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연령주의적 표현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젠더는 명확했다. 1948년생 여성이 25년생 남성보다 나이 듦, 죽음, 치매, 돌봄에 대한 염려와 사유가 훨씬 깊다. “여자의 정년”은 생물학적 나이인 마흔, 남자의 정년은 사회적 일을 그만두는 시기다. 다시 읽으니 절절하다. 정말 내 문제가 된 것이다.

공감 가는 구절.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투쟁해온 여성이 마침내 개인의 함정을 알아채고 이를 넘어서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더군요”, “비판적인 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을 부여해줍니다”, “의식적으로 포스트모던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왜 내가 포스트모던의 화신으로 취급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순에 접어들면서 무언가 미지의 차원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의 영원한 로망, 노라의 방주”, “(전공투를 회고하며) 가는 길만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서도 ‘해방’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내가 가장 지지하는 내용은 유명 소설가 아리요시 사와코의 인터뷰다.(194쪽) “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타인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지라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정갈함, 의존에 관한 상식을 깨뜨리는 놀라운 선언이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기는 일본 문화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체액이 통제되고 주름이 없고 머리숱은 풍성하고 허리는 곧으며…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도 꿈꾸는 몸이다. 그러나 노인과 장애인, ‘뚱뚱한’ 여성, 성적 소수자, 이들에 대한 차별은 바로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의 비참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마음속으로는)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한다. “몸 밖의 대소변”을 수용할 때 살아 있는 이웃들의 다양한 몸도 존중할 수 있다.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소중한 삶의 일부다. 어린 미모가 최고 가치인 사회에서, 나이 듦과 그에 따른 미추 관념을 바꾸는 것은 혁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년만의 과제가 아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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