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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치적 올바름

등록 2015-10-30 19:20수정 2015-10-30 22:1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지젝이 만난 레닌> 슬라보예 지젝·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08
1995년 <한겨레>에 일본 정부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광고가 실렸을 때 논란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여성운동은 군 위안부 관련해 국민기금 반대운동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매체에 정책 홍보가 아니라 국정 교과서처럼 ‘정권 광고’를 게재할 때, 즉 신문사의 기존 입장과 상충하는 내용일 때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광고와 기사는 별개라는 입장도 있고, 신문사를 비난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당성, 심지어 정치적 순결성 등으로 번역되어왔다. 문장 중간에 사족이지만, 순결성? 이 표현은 영어에 있지도 않다. 의역도 뭣도 아니다. 나는 정말 이렇게 번역하는 사람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 어쨌든, 줄여서 ‘PC’(피시)라고 부르며 냉소적인 어감이 강하다.

원래는 레닌이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 사용했다. 혁명의 영광도 잠시, 곧바로 시작된 내전과 외국의 군사 개입으로 인해 인민들의 궁핍이 극에 달하자 레닌은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한다. 이럴 때 꼭 반발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 레닌은 1920년 <공산주의의 좌익소아병(左翼小兒病)>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극좌파의 비현실주의(“순수정치”)를 비판한다.

이후 1960년대 미국의 시민권 운동에서 “실천의 다짐”으로 사용되었다가,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에 좌절한 리버럴들이 이 말을 자조적 의미로 쓰기 시작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군사, 경제, 문화(람보!) 등 전 영역에 걸친 레이건의 보수 정책에 지친 그들은 “넌 아직도 피시냐”며 순진한(naive) 동료를 놀리는 용어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198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비판, 자부, 주장, 냉소가 뒤섞여 통용되는 듯하다.

‘진보’ 신문의 국정 교과서 광고 게재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열변을 토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Revolution At The Gates)를 읽어주고 싶다. 레닌 입문서로 안성맞춤이다. 책 표지 문구는 왜 혁명이 인간의 영원한 신앙인가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회귀가 아니라 그 안에 구현할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그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600쪽 가까운데 문장마다 가슴이 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말, 구속적(救贖的) 폭력!

‘정치적 올바름’은 우호적인 번역이고 원뜻은 정치적 극단주의, 과잉 근본주의를 의미한다.(477쪽) 여기서 ‘PC’는 흑인을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부르자는 의미가 아니다(그 방면으로는 <정의롭게 말하기>, <어용사전>을 추천한다). 사회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올바름은, 필연적으로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보편적, 일률적인 올바름은 없다. ‘PC’는 불가능한 개념이자 문제를 한 가지 원인으로 생각하는 환원주의의 산물이다. 책에 의하면, 환원론은 실천 없는 이들의 무의식적 위치 이동이다. 어차피 안 될 일, ‘올바르게 보이는’ 주장이나 해보자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 광고는 일종의 ‘부의 재분배’다. ‘조중동’이든 ‘한겨레’든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이다. 또한 이들 제도권 신문의 기조는 중산층과 규범과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광고와 기사는 일치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사는 다 올바른가. 광고가 문제라면 나는 모든 기사를 내 올바름을 잣대로 비판할 수 있다. 단지, 내 기준은 기존의 전선이 너무 세서 무시되는 것뿐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레닌은 자기 결벽증을 과시하기보다는 인민을 사랑한 최고의 협상가였다. 진정 깨끗한 이들은 있지도 않은 ‘PC’를 주장하기보다 ‘더러운’ 선(線) 직전까지 갔다가 목표물을 성취하고 조용히 복귀한다. 자기만 올바름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正)을 두고 정치가 숨을 막는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잘못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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