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헬렌 켈러>,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미다스북스, 2001
<헬렌 켈러>,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미다스북스, 2001
헬렌 켈러를 모르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녀가 공산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1880년 미국 앨라배마주 북부 출생, 1968년 사망까지 그녀의 88년 생애는 미국 현대사를 압축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12년은 대통령 선거에서 100만의 시민들이 사회주의자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빅터 데브스에게 투표했고 1000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였다. 헬렌은 볼셰비키 지지자였던 <세계를 뒤흔든 10일>의 저자 존 리드, 에마 골드먼 친구였다.
헬렌 켈러는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전투적 여성 참정권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내게는 사회주의가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 물론 그녀는 열렬한 시각장애인 사회복지 운동가이기도 했다. “잔학한 자본가들”에게 맞서 싸우는 노동자 투쟁이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이겨내려는 자신의 투쟁과 비슷하다고 느꼈다.(338~353쪽)
헬렌 켈러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를 읽으면서 위인전에는 어떤 종류의 ‘19금’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렸을 때 읽은 것과 너무 다르다. 어린이는 세상을 알면 안 되나? 사실 모든 동화의 원작은 잔혹극이다. 위대한 인물은 부정의한 사회와 투쟁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헬렌이 헌신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고, 주류사회가 인정한 성취만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일까.
‘하나의 몸’이었던 설리번 선생님과 관계는 평생 좋기만 했을까. 개인 설리번의 인생은 어땠을까? 헬렌 켈러는 성인(聖人), 사기꾼이라는 이중의 평가에 시달렸고 그녀를 통해 돈을 벌려는 이들도 많았다. 같은 장애인들의 시기와 질투… 여성으로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욕망과 좌절. 여성의 사회 활동 자체가 ‘돌출’이었던 시대, 그녀는 장애 여성의 정치적 열정에 관한 대중의 의아함, 호기심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이 책은 여학생 입학이 금지되었던 하버드 대학의 여자 대학에 해당하는 래드클리프 시절 2학년 때, 그녀가 직접 쓴 <헬렌 켈러 자서전>(문예출판사, 2009)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의 자서전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설레는 소녀의 “꺄르르”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어린 시절, 여행, 설리번 선생님과의 추억, 공부에 대한 열망은 모두 “너무 즐거웠다”,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계였다”로 서술되었고 실제 그랬다. ‘불굴의 의지로 칠흑 같은 어둠을 이긴 위대한 영혼’이라는 표지 문구는 사실과 다르다.
도로시 허먼이 본 <헬렌 켈러>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박제된 인식에 대한 교정이자 도전에 있다. 3중 장애여성은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이면 안 되나? 박제(剝製)는 생각보다 무서운 말이다. ‘박(剝)’은 벗기다, 깎다, 찢다는 뜻. 그러니까 아예 다르게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와 그들의 사회운동에 대해 판관 노릇을 자처하며 이러쿵저러쿵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에도 그런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장애운동 외 다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싫어했고, 자기들이 정해놓은 성스러운 이미지와 도덕관념으로 그녀를 ‘숭배’했다.
헬렌은 여성, 장애인 이전에 열정과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매 순간 그렇게 노력하는 인간도 드물 것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메모하다가 나중엔 경건한 마음으로 정독했다. 이 책은 진부한 위인전이 아니다. 장애는 인간(몸)의 개념을 규정하는 근본적 인식 범주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장애, 성별, 인종, 성 정체성은 모두 몸에 대한 사회적 해석이다.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은 성적 소수자나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 노인, 건강 약자와의 연대에 더 관심이 있다.
사족 - 남자는 시대를 초월한 같은 인종? 설리번의 남편이었던 좌파 존 메이시는 ‘뚱뚱해진’ 설리번과 헬렌을 지겨워하면서도, 그녀들이 강연으로 힘들게 번 돈과 굴욕적으로 받은 후원금으로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을 숭배해줄 다른 여성을 찾아다녔다.(369쪽)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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