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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

등록 2015-09-11 20:0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내 무덤, 푸르고>
최승자 지음, 문학과지성사, 1993
영화 <올 더 킹즈맨>에서 가난한 이를 대변하는 숀 펜의 연설. “우리는 부자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진 것을 넘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이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주기를 바랍니다. 제 주장이 과격합니까?” 그는 공정 분배가 아니라 부스러기를 달라고 외친다. 조지 클루니의 <마이클 클레이튼>도 나를 울컥하게 했다. 알코올과 도박에 찌든 루저 변호사가 ‘갑’을 배신하고 정의를 실현한다. 이유는 그들의 오버 때문이다. “나 같은 놈한테는 돈 몇 푼이면 통하는데 굳이 죽이려고 해?” 매수만 해도 충분히 넘어갈 사람을 없애려는 시스템에 그는 분노한다.

영화 <베테랑>에는 내가 예전부터 고민하던 질문이 나온다. 형사(황정민)는 악당에게 묻는다.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 것을 왜 일을 그렇게 크게 벌여?” 그도 나처럼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대사가 당대 한국의 사회관계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욕이 일상인 사회다. 약자는 세상살이가 그런가 보다 체념하거나 저항하지만 곧 진압당한다. 그러니까 ‘갑’은 어떤 패악을 저지르더라도 “미안합니다” 한마디면, ‘잘 교육받은 지도층’이다.

<베테랑>에 묘사된 일부(?) 재벌의 일상은 나를 놀라게 했다. 정말 저렇게 살까? 물정 모르는 나의 반복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 정도까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자기한테도 불리한 오버를 할까. 급기야 재벌 2세(유아인)가 골프채로 애견을 죽이는 장면부터는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얼마 전 신문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시인 최승자가 생각나서 훌쩍거리다 나왔다.

그의 1993년 시집 <내 무덤, 푸르고>에 수록된 ‘세기말’은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로 시작한다.(36쪽) 이어지는 “나를 개 패듯 패줄/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오 맞아 죽은 개가 되고 싶다/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되고 싶다” 아, 재벌의 개는 양탄자를 만들 만큼 크고 비싸 보였다.

22년 전 시집. 최승자의 언어는 ‘악’을 압도한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밖과 융합되어 있다. 시인이 어떤 태도로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가가 언어의 깊이를 정한다. 그는 작은 몸으로 고통을 돌보고 있었다. 이것이 우울증이다. 질병으로서 우울증이라기보다 윤리로서 우울. 인간은 세상과 대전(帶電)할수록 덜 아플 수 있다.

<베테랑>의 재벌은 비서들이 공포에 떨 정도로 필요 이상의 모욕과 폭력을 사용한다. 우리는 왜 우울하고 자타칭 ‘치유자’를 갈망하는가. 조태오 같은 일반인도 많기 때문이다. 알바비 몇천원을 떼어먹고, 가족 이기주의로도 충분한데 가족 외부에 적대적이고, 100억 재산가가 세금 몇만원을 안 낸다. 때리기만 해도 ‘되는데’ 인분을 먹인다.

조태오는 샘플일 뿐 심각한 경우가 아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안하무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가지에 몰두한다. 내가 만든 조어대로 표현한다면 ‘안하일목’(眼下一目) 상태다. 권력, 돈, 사람, 셀럽(유명인사), 자녀교육… 도박과 마약일 수도 있다. 한가지만 중요하다. 그것이 나다. 세상의 기능은 자기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장치. 남의 생명과 상처는 귀찮을 지경이다. 시야는 미간의 폭보다 좁아져 점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나’ 개념이다. 주체가 대상을 억압한다? 주체와 대상의 상호 작용? 시인은 알았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음을. 사람의 욕망이 사람을 먹어치우고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이다. 이 사실처럼 우리가 자주 잊는 현실도 없다. 기억하기엔 너무 벅찬 숨소리인가. 슬픔과 우울은 소비의 적이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망각과 무관심이 우리를 자본주의의 환호로 이끈다. 세계는 죽음이지만 죽음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예술이 있고 시인은 그것을 환기시킨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된 시인. 다음 구절은 “그리하여 이십일세기 동안/ 당신들의 발밑에 밟히며 넝마가 되어가고 싶다(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원문)” 양탄자가 넝마가 되면 또 만들어야 할까.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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