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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의미는 재생되지 못합니다

등록 2015-09-04 19:4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번역사>, 레일라 아부렐라 지음, 이윤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글을 못 쓰는 사람이 하는 변명 중 하나가 “원래 쓰려던 것은 그게 아닌데 표현이 안 된다”다. 글은 표현인데, 표현을 못해서라니. 이건 본질적인 무능이다. 장정일은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내 글을 비판했다.(<한겨레> 8월28일치) 그가 비판한 내 글은, 내가 ‘표절을 자백한’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불필요한 서두와 앞뒤 주장이 맞지 않는 못 쓴 글이다. 존경하는 작가로부터 ‘글쟁이’로 언급된 것만도 영광이지만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거대한 뿌리”라는 주장이었고 나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썼다. “표절을 같은 단어에 집착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정일은 내 글의 일부를 “글쓰기 혹은 창작을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으로 옹호하면서, 창작과 글쓰기 공간에서 혼돈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는 기세다”라고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장정일이 동의하든 안 하든 “이응준을 지지하는 한편,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과 같다. 그의 말대로 무(無)는 그 어느 기원, 그 어느 장소에서도 실재한 적이 없다. 문학이나 글쓰기는 순수한 기억의 공간이 아니다. 예술가, 운동가, 자본가 모두가 숭상하는 상상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치의 이동에서 가능한 인식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순수한 말은 없다. 인류 최초의 언어는 전달(번역)이었을 것이다. 고종석의 지적대로 모든 번역은 원작의 표절(剽竊)이다. “원작”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대화가 말이 섞이는 것이라면, 침묵도 텅 빈 것이 아니라면, 쓰기가 지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원작’도 없다.

말 잇기 게임처럼 처음과 마지막의 내용은 다르기 마련이다. 모든 언어는 타인의 몸을 경유한다. 말하고 들린다. 나의 발화는 남의 몸을 통과하여 다시 표류한다. 그 과정에 개입된 권력에 대한 각성, 그것이 지성이다. 그래서 역사는 기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흔적을 추적하는 일이다. ‘표절’에서 ‘절(竊)’의 부수는 구멍 혈(穴). 글자 자체에는 ‘곁, 옆, 마음속으로’라는 의미가 있다. 훔쳤지만, 뭔가 흘러나오는 은근한 것이다.

레일라 아부렐라(1964~)의 장편소설 <번역사>(The Translator)는 이슬람과 서구 문화 간의 대화를 다룬다.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슬람 여성의 작품이지만 주제는 인류의 근원적 고민이다. 아부렐라는 분단 전까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수단에서 수단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런던에서 공부하고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번역된 우리말이 완벽에 가까운 덕분에 서두부터 주인공 이름인 사마르(늦은 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라는 뜻)처럼 금세 작품의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다. 내용은 극적이기보다는 작중 인물들이 이슬람 신앙과 맺는 관계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서구에 대한 입장이 주를 이룬다.

왜 통역사가 아니라 번역사일까. 바로 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갈등 없는 번역은 일방(서구)의 과정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잔잔하지만 격렬하다. 종교 간의 평화, 다양성, 관용 따위가 아니다. 그만큼 다른 문화에 이슬람 신앙을 번역하는 일은 전도(顚倒)에 가깝다. 자기 신앙부터 투명하지 않다. “의미는 번역될 수는 있지만 재생(再生)되지 못합니다. 물론 기적도 재생되지 못하지요. 모두가 그들이 듣는 것의 근원과 표현이 알라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최초로 믿은 이들은 여자와 노예였습니다. 아마 변화가 생겨도 별로 잃을 것이 없어서였을 겁니다.”(175쪽)

지구화시대. 번역의 불가능성은 추구해야 할 필수 가치다. 번역은 의미의 재생이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모든 언어는 자기 땅이 있다. 그 장소를 점령하면 안 된다. ‘쿠르젯’은 쿠르젯이지 ‘오이처럼 기다란 호박’이 아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표절은 말들의 전달(‘절도’)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판단과 논쟁을 요구하는 정치다. 물론 ‘신경숙 논란’은 별로 심오하지 않다. 원작과 표절이라는 상투적인 대립 구도에서 당대의 윤리와 지성의 수준을 보여줄 뿐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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