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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자신을 부정하는 능력

등록 2015-08-14 19:15수정 2015-08-14 19:1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증오에서 삶으로>, 필리프 모리스 지음, 한택수 옮김
궁리, 2002
최근 본 미국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은 반전의 연속이다. 절대 권력자는 제자에게 “넌 끝났어”라고 선고한다. 연주도 완전히 망친 상태에서 주인공은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무대에 선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다. 드럼주자의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스틱과 칫솔뿐. 자기 완성의 열정에 사로잡힌 열아홉살 소년의 텅 빈 방 안에 칫솔이 클로즈업될 때는 눈물이 났다.

올해 상반기 뉴스 메이커였던 표절과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은 영화의 주인공과 다른 길을 간다. 문제 당사자를 사랑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부당한 ‘명예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폭력 사건은 사법 처리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들이 ‘끝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인생이 한번의 사건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정작, 사건을 더 크게 만든 이들은 여론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후 대처였다. “감히 ~ ”, “그동안 공(功)”, “과도한 비판”이라는 엉뚱한 항변으로 스스로 분지(糞池)에 누웠다. 매장? 자기가 땅을 팠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두번째 기회는 있다. 그것은 자기 부정 능력에 달렸다. “나는 대단하다”는 주문(呪文)에 걸린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을 우습게 볼 줄 아는 사람은, 절대 타인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태도가 잘못도 커버할 수 있다. 세상은 ‘전과자’의 두번째 기회(‘갱생’)에 대해서는 야만적일 정도로 가혹하지만, 스스로 두번째 기회(‘재기’)를 짓밟고 세상을 속이는 ‘힘 있는 비리’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나는 그런 관대함이 두렵다.

서설이 길었는데 두번째 기회와 자기 부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2000년, 23년간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필리프 모리스 ‘박사’가 겪은 실화 <증오에서 삶으로-어느 사형수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 ‘공화국 프랑스’의 주류 시민과 동일시하는 한국인에게 권하고 싶다. 지은이는 1년 반 동안 1500번 정도 몸수색을 당했다.(189쪽)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말, “교수대에 오르는 순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집행은 무의하다”. 저자는 내내 이런 심정으로 살았다. 문명국? 나는 언제나 ‘알제리인’의 입장에서 프랑스를 본다.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는 교도 행정, 학대, 죄수들의 분노와 저항. 감옥은 지옥에 굉음이 겹쳐진 듯하다.

“한 인간이 자신과 단절되는 순간은 언제인가.”(16쪽) 주인공은 평범했던 삶이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시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시작한다. “미래, 직업, 출소 기회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공부한 것은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244쪽) 그는 대입 시험부터 시작하여 걸출한 석사, 박사 학위논문을 쓰고 감옥에서 심사를 받았다. 부모의 이혼과 가난, 형과 함께 건달로 살다가 사소한 일이 겹쳐 사형수가 되었다가, 결국 집안의 첫 대졸자가 된다. 1200쪽에 달하는 박사논문을 하루 8~16시간씩 썼다. 그는 단지, 미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숨찬 증오의 시간,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첫번째 자기 부정은 외부에 의한 것이었지만 두번째 자기 부정은 쇠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가는 삶을 붙잡으려는 사력을 다한 노력이었다.

누구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계기는 발견한다기보다 지금 현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저절로’ 온다. 변화가 아니면 죽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추락 직전에 자신을 구원하는 이들이 있다. ‘증오에서 삶으로’는 저자가 성취한 것이고, 그 전제는 단절할 수 있는 용기다. 자기 부정이 안 되는 이유는 기득권으로 현실이 만족스럽거나 도취로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사족 1-영화 제목 <위플래쉬>의 뜻은 채찍질. 사족 2- “많은 교도관들이 내가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막 웃었다, 울었다. 나도 내가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매일 싸운다. 모리스는 무시했지만 나는 직접적 태클이 많아 그럴 수가 없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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