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제2의 성(Le Deuxieme Sexe, The Second Sex), 상/하>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1993
<제2의 성(Le Deuxieme Sexe, The Second Sex), 상/하>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1993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범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나를 포함한 ‘여자의 일생’의 일부다. 몇 주간 인터넷을 달구었던 진보 남성의 폭력. 알고 있던 사건도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실제 상황을 모두 보고한 피해자는 없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통념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얘기다.
폭력은 불법이다. 합법적 폭력인 공권력조차 허용 범위는 대단히 좁다. 폭력을 당했으면 가해자가 누구든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피해자의 신원이 공개될 일도 없고 ‘범인’의 진정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사법 체계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여성이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인권 의식 향상으로 신고율이 높아져도 걱정이다. 검경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까? 강간 신고율이 왜 6% 미만이겠는가.
지금처럼 피해자가 자신의 사회적 경력, 인간관계 심지어 목숨을 걸고 사건을 알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한 놈도 있는데, 왜 나만?”에서부터 “피해자 말은 사실과 다르다”까지. ‘용의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당신들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건이 경찰서로 가지 않고 인터넷에서 터진 것은 역사의 부메랑이다. 억울하면 5천년간 누적된 ‘아버지의 역사’를 공부하라. 그런 사람이 남성 페미니스트다. 가해자가 페미니스트로 갱생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번에 제기된 사건들의 내용과 불법의 정도는 동일하지 않다. 폭력의 물리적 심각성만 강조될 때, 진짜 구조는 실종된다. 여성 대상 폭력의 특징은 가장 죄질이 나쁜 사례가 법으로는 가장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집단 신고’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웹툰 작가 강도하의 1:1 팬미팅, ‘도하걸 모집(시즌1, 시즌2…)’이다. 성추행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명세(稅)를 치르지만, 어떤 이는 유명세(勢)를 적극적으로 행사한다. 출판 관계자들의 호소에 따르면, 일부 남성 저자들은 “조금만 뜨면 망가진다”고 한다. 특히 예술가연하는 이들과 진보 남성. 이들은 책이 조금 팔린다 싶으면, 독자가 아닌 본인이 ‘독자와의 만남’, ‘~ 콘서트’를 요구한단다. 이를 유명인사 등극의 기회로 삼고 연애나 섹스 같은 남성성 실현의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행동으로 고발당할 남성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신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일제시대 ‘마르크스 걸’부터 ‘신여성’, 당대의 ‘~빠’, ‘된장녀’까지. ‘도하걸’은 이 정치학의 절정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아버지, 남편, 애인 등 남성과의 관계에서 정해진다는 믿음이다. 남성만 인간이므로 제1의 성. 여성은 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이기에 제2의 성이다. 그나마(?) ‘도하걸’에 들 수 있는 제2의 성은 젊고 예뻐야 한다. 성적 소수자나 아줌마는 ‘제3의 성’이다.
‘~ 걸’은 여성이 자기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는, 조물주 망상이다. 진보? 지금은 중세이고 그는 중세의 신이다. 물론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성은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여성은 ‘마르크스 걸’이다. ‘모던 보이’도 있다고? 맞다. 이것이 타자성의 본질이다. 모던의 주체는 서구이므로 식민지 조선의 남성은 모던할 수 없다. 모던(서구)의 ‘보이’인 것이다.
위 이야기는 <제2의 성>이 본 2015년 한국 사회다. 1949년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프랑스 지성계는 싸늘했지만 대중의 호응은 엄청났다. 사르트르의 알제리 독립투쟁 참여와 파농과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보부아르가 나도 못마땅하지만, 이 책이 현대 페미니즘의 서장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실존주의 철학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사례가 풍부해서 서양의 종교와 문학을 두루 접할 수 있다.
여성주의는 양성 이슈, ‘여혐 대 남혐’ 식의 대칭 언어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 질문, 즉 인간의 범주에 관한 인식론이고 <제2의 성>은 그 역사를 압축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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