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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때

등록 2015-06-12 19:55수정 2015-06-12 21:5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까치, 1985(1996)
1084년 설립. 1300m 알프스의 깊은 산세에 가톨릭에서 가장 엄격하기로 알려진 카르투시오 수도원(Charterhouse)이 있다. 그곳 수도사들의 일상을 담은 걸작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Die Große Stille, 2005)은 대사, 조명, 음악이 없다. 자연광에만 의존한 어두운 화면에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영화지만 의외의 흥행을 기록, 평일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162분을 견디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70석의 작은 공간은 코고는 소리, 잠꼬대, 도중에 나가는 이들의 커튼 여닫는 소리가 ‘위대한 침묵’을 대신했다.

한번 입회하면 나올 수 없고 대화는 금지되어 있다. 평생의 침묵. 기도와 묵상, 자급자족 노동, 펜에 잉크를 찍어서 필사하는 수도사들.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그곳일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영화를 즐긴 몇 안 되는 관객이라는 자부심에 넘쳤지만, 실제 그런 생활을 하라면 못할 것이다. 현대는 개인(個/人)의 시대지만 많은 이들이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 티브이를 켜놓고 밥 먹고, 식사 중에도 통화를 하고, 분 단위로 에스엔에스(SNS)를 사용한다. 나 역시 종일 말한다. 생계형 글쓰기 노동자여서 글로 떠들 뿐이다.

침묵으로 불리는 다양한 상황이 있다. 단지 아는 것이 없어서 과묵, 슬픔과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음, 모르는 외국어가 요구되는 상태, 대응할 논리가 없음,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 육체의 마비, 말할 기운이 없음, 기회주의, 사회적 약자의 언어 없음, 말하기 싫음, 저항…. 모두 소극적 의미의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1888~1965)는 말로서의 침묵을 주장한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책일 것이다. 읽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기분, 동시에 침묵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자아와 침묵’ 편에서 침묵이 자기발전, 변신과 맺는 관계이다. “침묵은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인간이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수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결여된 오늘날의 인간은 더 이상 변신할 수가 없다. 다만 발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발전이 그렇게 중요시되는 것이다. 발전은 침묵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논란 속에서 생겨난다.”(64쪽)

한국 사회에서 발전은 대개 좋은 의미다. 경제발전이든 자기계발이든 한 방향으로의 향상, 곧 경쟁력 강화다. 발전은 ‘타인보다 앞선다’에 초점이 있다. 발전은 타인과의 관계인 반면 변신은 과거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변신은 자기 내부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수평의 상승, 성장이다.

발전주의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데올로기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다. 피카르트가 책을 쓴 1948년에도 발전은 문제였지만, 믿을 것은 개인의 능력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시대에 발전은 절대 가치다. 문제는 모두가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 체제는 대안을 만들어주었다. 무제한 발언이 가능한 가상현실이 현실로 등극했다. 이전 시대 유명은 명예를 의미했지만 지금은 악명이든 범죄든 상관없다. 누가 더 이전투구에 강한가를 시합한다. 부고란에 본인 사망만 빼고 모든 곳에 이름이 나야 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이 책은 말하기를 비판하지 않는다. 침묵이라는 형식의 말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 고뇌와 연동한다는 사실이다. 고뇌하는 사람은 엄밀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는다.” 그러나 침묵의 다리가 균형을 이룬다는 보장은 없다. 지나간 생이 무거워서 다리가 기울어진다면, 무너진다면? 두려운 시도다. 변신보다 발전이 쉽다. 남들도 알아준다. 하지만 침묵은 자기와의 대화. 자신과 만남은 존재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이 책은 남을 속이는 것과 자신을 속이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해준다. 더불어 내가 왜 계속 떠드는지도 깨달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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