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몸에 깊숙이 박힌 못을 어떻게 빼내요?

등록 2015-06-05 19:46수정 2015-06-05 20:3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길, 저쪽>
정찬 지음, 창비, 2015
소설가 정찬의 문장을 부러워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언어의 결정(結晶)은 극한의 노동의 산물이다. 게다가 그의 사유는 결정(潔淨)을 향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대결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일부 평자들의 견해와 달리 그의 작품은 시류와 어울린다. 누구나 작가인 시대, 글쓰기의 민주화가 언어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된 지금, 그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예술가다. 데뷔 33년차에 이르러서도 “쉼 없이 언어와 싸우며, 번번이 무릎을 꿇으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가혹한 싸움”을 멈추지 않은 소설가. ‘연륜에 맞는’ 태작이 없는 작가.

<길, 저쪽>은 정찬의 신작 장편이다. 작품은 유신체제와 군사정권 시절에 일어난 고문과 피해 당사자들의 다양한 ‘선택’을 탐구한다. 지금도 계속되는 폭력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해자가 개인인가 국가권력인가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을 독재, 민주화, 폭력, 구원, 용서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평생 동안 상처를 화두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고문자들. ‘자백’. 무의식 속에서라도 숨겨야 할 동지의 이름을 몸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육체의 고통. 여성이 당하는 고문은 ‘피부’의 파괴와 관련이 있다. 피부의 두 가지 의미. 실제 몸의 경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방벽. 주인공은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고통을 통과하면서 강제로 몸에 들어온 못(아이)을 간직한다.

“몸에 깊숙이 박힌 못을 어떻게 빼내요? 저는 예수의 몸을 생각했어요. 예수의 몸속으로는 더 크고 더 깊은 못들이 뚫고 들어갔어요. 예수는 그 못들을 말끔히 빼내었지요, 용서를 통해. 하지만 저는 예수가 아니잖아요. 살 속에 박혀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못을 빼낸다는 것은 못의 고통을 되살리는 행위예요. 저에겐 그랬어요. 저는 기도를 할 수 없었어요. 기도에 대한 생각만 했어요. 그럴 때마다 영서가 떠올랐어요.”(191~192쪽)

몸에 들락거리는 다양한 외부 요소는 처음에는 이물감을 주지만 결국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는 생명의 과학, 당연한 말의 반복이다. 만물이 우리 몸에 처(處)한다. 외부의 자극에는 즐거운 것도 있고 영원한 상처도 있다. 아름다운 자극은 부드럽게 들어온다. 고통은 그렇지 않다. 피부는 전선(戰線)이 된다. 자아는 혼란과 반란을 반복하면서 전시 상태를 살아낸다. 몸은 안팎이 없다. 이를테면 칼에 찔렸을 때 갑자기 칼을 빼내면 출혈로 죽는다. 칼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몸에 들어오면 나의 일부가 되어 피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피아가 분간되지 않은 상태다. 내외부가 확실히 구분될 때 사람은 죽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최악의 이물질은 무엇일까. 폭력과 5%의 현실(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확률)은 여성주의의 오랜 논쟁이었다. 국가(nation)의 어원은 낳다(nate). 유사 이래 모든 전쟁의 공식 전략 중 하나는 대량 성폭력(mass rape)이다. 여성의 몸에 국가(남성)를 세우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역사를 전복한다. <엄마를 낳은 딸>(The Woman Who Gave Birth to Her Mother)이라는 여성주의 정신분석 책이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서(아이)가 저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 죽으러 강으로 들어갔을 때 저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던 존재, 제 몸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던 존재(…)가 영서였어요. 영서는 제가 낳았지만 저 역시 영서를 통해 다시 태어났던 거예요.”(256쪽)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길, 저쪽>의 표지는 무수한 문들의 연속이다. 새로운 인식이라는 치유의 본질을 상징하는 멋진 사진이다. 작가는 끔찍한 비참을 바라보고 환부를 드러낸다. 그는 슬픔의 힘을 잘 알고 있다.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사람과 그들의 시대. 치욕과 원한의 못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이기는 ‘못’은 없다. 범람하는 눈물의 강에서도 사랑은 한결같지만 못은 산화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1.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2.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윤석열의 ‘1도 2부 3빽’과 백색테러 [유레카] 3.

윤석열의 ‘1도 2부 3빽’과 백색테러 [유레카]

트럼프·조기대선 ‘불확실성’의 파도 앞에서 [뉴스룸에서] 4.

트럼프·조기대선 ‘불확실성’의 파도 앞에서 [뉴스룸에서]

문제는 윤석열이 아니다 [김누리 칼럼] 5.

문제는 윤석열이 아니다 [김누리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