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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은둔

등록 2015-05-22 19:06수정 2015-05-22 21:4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숨어사는 즐거움-은둔과 풍류 이야기>
허균 지음, 김원우 엮음, 솔, 1996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 정도면 행복한 고민이다. 그다음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 바엔.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죽고 싶다… 사는 게 정말 쉽지가 않다. 그런데 대안은 없다. 인생이 지옥이고 죽음이 천국이라면, 연옥쯤에 해당하는 것이 은둔 아닐까. 세속이 비대해질수록 은둔의 영역도 변동했다. 역사상 은둔이 가장 간단해진 시대는 지금이다. 기기가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시민권이 되었으니, 휴대전화와 인터넷 계정만 없애면 절로 은둔이다.

이 책의 원전 한정록(閑情錄)은 허균(1569~1618)이 그로서는 불우한 시기였던 42살에 중국 고서들을 읽으면서 예전 선비들의 은둔 철학을 모은 일종의 독서 노트다. 이 책을 소설가 김원우가 엮어 편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겼다. 허균도 김원우도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구구절절 흥미롭고 깊이 있는 말씀들이다.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좋다.

하지만 은둔이나 풍류도 보편적인 인간 경험은 아니다. 노비의 은둔은 도망자의 삶이다. 책의 부제인 ‘풍류’나 자주 등장하는 술타령도 내겐 뜨악한 이야기. “무릎을 꿇고 식사를 올리는 비녀(婢女, 43쪽)”의 시중을 받는 생활은 은둔이 아니다.

도인부터 히키코모리까지 동서고금을 통해 은둔의 정의, 범위, 방식은 다양하다. 세상에 대한 환멸, 결벽증, 유배, 타고난 염세주의, 자연 친화적 삶, 고상한 삶의 추구, 사람보다 책이 좋은 사람, 물러남의 지혜… 자살이나 집단 우울증보다는 자발적 선택이든 “다시는 사람을 믿을 수 없어서”든, 은둔이 낫지 않을까. 사회적 죽음으로서 은둔을 생각한다면 조금 덜어내는 삶, 은둔을 제안한다. “말세” 한탄은 플라톤 시절부터 있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경우는 드물다. 사람으로 인한 즐거움보다 책, 음악, 자연이 주는 것이 쾌락이 훨씬 크다.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사람만이 고칠 수 있다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사람 없는 치유를 기대한다.

“장목지(張牧之)는 죽계에 숨어 살며 세상을 피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사이에서 몰래 엿보다 훌륭한 사람인 경우에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를 만날 수 없는 속된 사람들은 그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35쪽) 이 정도면 ‘숨어 사는 즐거움’이라 할 만하다. 장목지 같은 이들은 세속의 외부 같지만 세속적 선망의 대상이다. 반면, 기피나 도피는 죽고 싶을 만큼 고달프고 의욕이 없지만 죽을 수는 없어서 사회 활동을 중단하거나 최소한만 기능하는 삶이다. ‘낙오’든 자발적 루저든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나는 모든 은둔을 지지한다. 은둔은 소비의 절제, 지속 가능한 삶이다.

이 문제도 양극화인지 우울과 경조증(輕躁症) 인구가 동시에 증가하는 것 같다. 특히 지나치게 유명을 추구하거나 목표 지향적인 사람은 위험하다. 사실, 이들의 당당한 부도덕성이 우울형 은둔의 근원이다. 제일 괴로운 이들은 멘탈은 취약하고 정신력은 면역 결핍인데, 정치 사회 문제에 걱정과 분노가 많은 경우다. 게다가 마음만 앞서는 ‘욱하는’ 정의감까지 있다면, 목숨 보전을 위해 잠시라도 은둔하는 것이 좋다.

은둔을 선택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이 더럽다”는 것이다. “지사는 도천(盜泉)의 물도 마시지 않고(중국 산둥성에 있는 샘으로 단지 이름에 ‘도’자가 들어갔을 뿐이다), 청렴한 사람은 무례한 태도로 주는 음식도 받지 않는다.”(116쪽) 허균이 쓴 ‘서’(序)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5쪽). “요순(堯舜)시대에(조차) 요(堯)가 허유(許由)에게 구주(九州)의 장(長)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귀를 씻고 세상이 자기를 더럽힐까봐 은거하였다.” 귀를 씻을 것까지야. 이 정도의 오만, 세상과 거리를 두려면 자원이 많아야 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소박하게 살고 싶어서, 만사가 귀찮아서, 사람이 싫어서… 은둔을 고민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은둔이 도피 이상이 되려면 입장이 확실해야 한다. 나의 잠정 결론.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이라도 거사(居士).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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