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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등록 2015-05-15 19:5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문명 속의 불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1997(2014)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인간 주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알튀세르의 이 말은 서구 근대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요약 중 하나가 아닐까.(‘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 뒤표지) 프로이트 사상은 결정론적이지만, 흥미롭게도 뿌리보다 더 강하고 섬세한 가지들을 파생했다.

혐오(hating)에 대한 고전적 분석도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인간이 자기 외부(타자)를 만들어서 인생고를 해결한다고 보았다. 그 과정이 문명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 사회의 문맥이다. 식민과 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 문명은 후진성을 극복하는 계몽, 발전, 진보 등 긍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프로이트에게는 문명과 본능적인 삶(성욕)의 대립을 설명하기 위한 ‘중립적’ 의미였고 걱정거리(“그 불만”)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생은 너무 힘들다. 인생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안겨준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수단으로 세 가지가 있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는 강력한 편향, 고통을 줄여주는 대리 만족, 고통에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246쪽) 인간은 원래 행복할 수 없는 종자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본 고통의 근원은 유한한 육체, 외부 세계, 타인과의 관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혐오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 혐오다. 고통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때 처음 등장하는 존재는 동물, 자연, 본인의 배설물이다. 남성(인간)에게 여성(인간 아님)은 이 세 가지를 인식하는 시작이자 교집합이다. 이렇듯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자기 내부의 관념에서 나온다. 파시즘이 그 정점이다. 파시스트는 피아, 자아 경계가 없다. 나 = 세상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적 ‘대세’. 여성, 전라도, 성적 소수자, 이주 노동자 등에 대한 혐오 발화를 분석하는 데 프로이트는 얼마나 유용할까. 그는 언제나 생각의 실마리만 줄 뿐이다. 실천력이 ‘없다’. 분석과 설명의 대가지만, “예언자도 위로도 주지 못하는 나(프로이트).”(329쪽) 하지만 나는 그의 전치(轉置, displace, 자리를 옮기는 것) 개념을 좋아한다. 남 탓으로 돌리거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심는다.

여성은 남성에게 언어의 토대가 된 존재다. 한마디로, 가장 만만한 타자다. 남성은 여성과 접촉하고 싶으나 접촉하면 자기가 오염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이치와 논리를 포기하고, 막 나간다. 이 과정에서 전쟁과 폭력은 필연적이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모르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개념이 없다. 이 방면의 대가, 안드레아 드워킨이 말했다. “의미를 모르면 고통도 없다.”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도취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 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깃이다. 상대를 혐오, 조롱(‘풍자’)했을 때 사회적 처벌과 반응 등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권력 관계의 달인이다. 남성연대 앞에서는 어떤 사유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며 가해를 방어하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포함, 이들의 반사회성은 사회적으로 훈련된 문명의 결과다.

혐오 발화는 자기를 바라볼 필요도 용기도 없는 이들의 테러다. 자신을 모르는 이에게 가장 좋은 치유는 면벽(面壁)이다. 면벽? 깨달을 때까지 격리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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