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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무지는 어떻게 나댐이 되었나

등록 2015-04-24 19:3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해릴린 루소 지음, 허형은 옮김, 책세상, 2015
얼마 전 ‘‘그런’ 페미니즘은 없다-불안은 어떻게 혐오가 되었나’라는 주제의 강의가 있었다. 우리 사회 일각의 여성 혐오 현상을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이럴 때 꼭 등장하는 이름, 일베. 그들만 그런 것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어쨌든 페미니즘은, 무엇이 페미니즘인지 또 그것은 누가 정하는지를 경합하는 인식론이므로 앞의 문구는 좋았다. 그러나 “불안은…” 이 구절은 상투적이다. 누군가(여성, 이주노동자) 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소문이 돌면 나오는 분석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는 세력은 기득권층도 있지만 비슷한 처지의 약자인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하다. 이 문구는 잘살게 되면 마치 불안이 없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나는 다른 구호를 제안했다. “무지는 어떻게 나댐이 되었나”. 학력(學力)이든 학력(學歷)이든 유·무식, 인식·무지와 무관하다. 사람마다 아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왜 어떤 지식은 사상이고, 어떤 지식은 경험인가. 왜 어떤 무지는 수치심인데, 어떤 무지는 권력이 되는가. “무식하다”는 욕 같지만 자기 위치를 모르는 이들에겐 완장이다. 그래야 통치가 가능하다. 대개 남성들은 ‘지식인’이든 아니든 여성주의를 모르는 것을 자랑스럽거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치려는 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미국의 장애여성운동가, 화가, 작가이며 경제학을 전공한 해릴린 루소의 자기 이야기다. 1946년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나는 추천사를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은 감격하며 썼다. ‘거지와 불구’(42쪽~), ‘거리 두기(285쪽~)’는 동정이 어떻게 관계의 예술로 변화하는가를 보여준다.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 항상 양가감정에 시달린다. 자기혐오와 연민, 피해의식, 분노가 나를 삼킬 때는 나도 저자처럼 죽고 싶다.(202쪽)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자기 재현이다. 이 책은 내가 아는 자기 이야기 중 베스트다. 이런 사유에 도달하려면, 정치적 지적 인간적으로 얼마나 성숙해야 할까. 이 책은 장애 여성 관련서가 ‘아니다’. 몸, 관계, 사회라는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룬다. 인문학 ‘입문서’의 모델이자 타자 없는 사회라는 인류 최상의 선을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빼어난 정치학은 배려, 호기심, 평등(같아지라는 요구)처럼 아름다운 듯 보이는 태도가, 실제로는 얼마나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배제의 정치인가를 분석했다는 점이다.(추천의 글 중 일부 수정)

“무지한 사람들과의 달갑지 않은 조우”에 나오는 얘기들은 나도 매일 듣는 레퍼토리다. 무지(clueless)는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의 ‘클루’는 단서, 실마리이므로 클루가 없는 인간은 ‘개념이 없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화는커녕 접촉에서부터 폭력을 발산하는 사람들이다.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들. 권력이 부여한 무지는 국가도 구할 수 없다. 그들을 밟아줄 (상상 속의) 코끼리가 필요할 뿐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누구나 질문이라는 형식의 모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여자가 왜 직장을?, 장애인이 왜 공부를?) 사람들이 무지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즉 잠시 입을 다문다면 그것이 평화요, 힐링이다. 인간이 자기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통로는 거울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거울 속의 나를 보지 못하는”(155쪽)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모는 특정 이미지로 정형화되어 있고 의료 체제와 매체에 의해 수시로 변한다. 그 전형을 따라잡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힘겨운 세상이다. 이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만인에 대한 전투가 되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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