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세상에 여전히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타인을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거니까. 한 시대 대중이 특별히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의 출발은 시와 다르다. 시가 독방에서도 가능한 단독자의 성채라면 소설은 저잣거리에서 태어나고 소비되는 운명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견디고, 그 삶이 다시 이야기가 되는 순환과정을 적극 끌어안으며 소설은 인간의 역사를 위무해왔다. 애초부터 자본논리의 외곽에서 태어난 소수자문학이 시라면, 소설은 자본/저잣거리 안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끝내 지켜가려는 열렬한 몸짓이다. 그러니 소수만 열광하는 지적이고 어려운 소설이 ‘문학적’이라고 고평될 이유도, 다수 대중이 선호한다는 이유로 ‘장르적’, ‘대중적’이라는 말로 폄하될 이유도 없다. 대중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으로 현명하다. 이야기의 공감력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대중이 예컨대 루쉰의 <아큐정전> 같은 한 시대 소설적 전형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시장원리 바깥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항체로 존재하려는 시와 자본주의 안에서 안간힘 쓰며 인간의 얼굴을 지켜내려 하는 소설 중 무엇이 더 적극적인 항체인지 쉽게 말하긴 어렵다. 분명한 건, 소설 읽기가 수없이 많은 시공간 속의 다양한 ‘타인의 삶’을 가장 저렴하게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것! 이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김선우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