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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글짓기, 글쓰기

등록 2015-03-20 19:51수정 2015-03-26 00:0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지음, 돌베개, 2013
이오덕은 글은 ‘짓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은이(작가)’가 아니라 ‘글쓴이’다. 관념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지 말고 자기 삶에 근거한 살아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동의하지 않으랴.

그런데 조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은 글을 “지으라”고 주장한다. 나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잘 쓴 글은 잘 지은 글이다. ‘쓰다’에 세우다, 이루다, 나타내다를 의미하는 ‘저(著)’가 합쳐져 저서(著書)다. 짓다에 작위적인 어감이 있어서 그렇지, 짓는 것은 제작과 실천이라는 의지의 산물이요 창조적 행위다.

글짓기든 글쓰기든 문장의 최대 이슈는 과정과 목적이다. 트위터의 140자, ‘학술 논문’, 소설. 분야를 불문하고 자신의 고민과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사람의 심정은 같다. 글쓰기 책 저자들이 제시하는 ‘글 잘 쓰는 방법’도 대개 비슷하다. 독창성, 많은 생각과 독서, 과정으로서 쓰기, 비유 활용, 진정성, 현학과 탁상공론을 피하라 등등. 스티븐 킹부터 안건모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세상이 좋은 글로 충만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리 글쓰기 책을 읽고 노력한다 해도 자기를 이기기는 힘든 법이다. 나도 늘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르침대로 쓰지 못하고 성질대로 쓰다가 길을 잃는다.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의 저자 박수밀이 분석한 연암의 글쓰기 사상의 핵심은 정치학이다. 방법론은 전략(4부). 연암은 “요령”이라고 겸손해했지만 전략이야말로 딱 맞는 표현이다. 글쓰기를 정치적 투쟁의 일환으로 본 연암에게는 주장이 가장 중요했다. 흔히 표현력이라 불리는 능력은 주장에 맞는 어휘 선택과 문장의 배치로 이루어지는 입체 만들기, ‘집짓기’이다. “글자는 군사고 글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를 끌어들이는 것은 싸움터의 보루다. … 문장을 이루는 일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 글자가 우아한지 비속한지나 평하고 문장이 높네 낮네 따지는 자들은 적을 제압하는 저울질을 모르는 자다.”(155쪽)

하지만 주장이 있는 글은 동의와 이해를 얻기 어렵다. 주장을 효과적으로 소통하려면 ‘이기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상대를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려면 정세와 독자, 주제, 나의 위치를 다각도로 고려하여 ‘아름다운 짓기’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이 글 쓰는 과정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격려받은 부분은 글짓기의 목적이 도덕과 인륜이 아니라 뜻을 펴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본 연암의 성정이다. <사기>의 문면(文面)을 읽지 말고, 친구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궁형(宮刑)을 당한 사마천의 울분을 읽으라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프고 속상한 마음을 형상화하는 행위다. 이른바 발분저서(發憤著書)! 분한 일을 당하고 나서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연암이 주장한 글 짓는 목적이다.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 주장이 없어도 되는 사람은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안주 상태에서는 참된 문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뿐”이다. ‘뜻을 드러내다’의 원문은 사의(寫意)인데, 직역하면 ‘뜻을 쏟아낸다’는 뜻이다.(83쪽) 자기주장이 창작의 요체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해서 우유부단하기만한 글을 어디다 쓰겠는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이제는 고전이 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자신이 피억압자라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 사회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과정의 분노와 열정이 걸작이 된 경우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회변화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사회를 다시 짓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

운이 좋으면 후학 유만주(兪晩柱)처럼 연암의 문장을 가리켜 “자기심골(刺肌沁骨), 살을 찌르고 뼈에 스며든다”는 독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조우일 뿐 목적일 수는 없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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