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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구리 거울

등록 2015-03-13 19:4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
김윤식 지음, 솔, 1999
나는 지금 15년 전 김윤식을 따라 일본 교토(京都) 거리를 걷고 있다. 그의 교토문학기행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의 여정대로 염상섭의 하숙집, 윤동주와 정지용, 김환태가 공부한 도시샤(同志社) 대학,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교토시 사쿄쿠(左京區) 시내,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에 서 있다. 이 작은 강가를 산책했던 윤동주를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나의 냉소를 부끄럽게 해 준 그의 시와 시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경험한 교토의 역사, 자부심, 묘한 아름다움은 여기 다 쓸 수 없다. 일본은 서구를 더 서구답게 실현한, 원본을 초과 모방한 제국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금세기 인류 역사-식민, 탈근대, 자본주의,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의 축도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일본은 계몽주의와 자본주의, 식민성이라는 욕망과 모욕의 고통스러운 조합을 체험케 한 어지러운 거울이다.

교토에 올 때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중화(中華)와 미국 중심주의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앉아 우물 안 개구리를 자임하며 불안한 안도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콤플렉스는 일본에 대한 무시와 과잉 반응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일본은 영혼까지 자본주의에 체화된 ‘선진’ 사회다. 교토는 나를 압도한다. 2등 국민(여성)인 나도 지금 이렇게 기분이 나쁘고 미칠 것 같은데, 일제 때 유학 온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였을까.

책은 한국 근대 문학 전공자인 저자가 우리 문인들의 젊은 시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한다. 헤겔,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루카치를 렌즈로 쓰기도 하지만 정작 빛나는 것은 김윤식 자신의 시각이다. 그는 이양하, 윤동주, 정지용이 헤겔과 니시다(西田)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255쪽) 교토의 천년과 경주의 천년이 같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19쪽).

식민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의문 속에 살아간다. 타인의 언어로 나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서구)의 파생인가, 포즈에 불과한가.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89쪽) 김윤식이 인용한 윤동주의 ‘참회록’ 일부는 이 책과 한국현대사를 요약한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거울은 자기 인식의 단계이자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한 인식은 착각에 불과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같다면 자기 복제가 아닌가. 결국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 보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관계성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부분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거울 자체에 있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과 “구리 거울”은 두 시인의 생애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미당의 거울은 어설픈 흉내다. 나르시스의 거울, 바슐라르의 투명한 거울(90쪽)은 서구에도 없다. 거울의 위계는 곧 존재의 위계다. 녹슨 구리 거울, 감옥의 플라스틱 거울, 공중화장실의 얼룩진 거울, 요철(凹凸) 렌즈… 여성, 제3세계 민중, 주변인에게는 투명한 거울이 주어지지 않는다. 윤동주는 정확했다. “구리 거울은 욕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거울의 차이는 자기 인식의 불평등을 뜻한다. 깨끗한 거울을 갖고 싶은 욕망은 지배의 효과다. 맑은 거울에 비친 손상 없는 자아는 가능하지 않지만, ‘백인 남자’는 자기 모습을 인간의 기준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거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한 해방은 없다. 거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굴절이나 반사(反射, speculum)를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대안은 거울을 깨버리는 것이다. 주먹으로 박살난 거울의 파편에 비친 세상. 이 분열 없이는 우리는 타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평가가 왜 예술가이겠는가. 김윤식은 이 책에서 내내 피로감을 호소한다. 윤동주의 “구리 거울”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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