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지난달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종도서 토론회는 그 의미와 성과에 못지않게 많은 과제와 고민을 남겼다. 세종도서라 불리는 우수 문학 도서 사업을 주관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선정 기준 가운데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도서’라는 규정이 결국 국회 토론회로까지 이어진 논란을 낳은 셈이지만, 토론회를 거치면서 문제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추가로 확인된 것이다.
정부를 대표해서 나온 문체부 출판인쇄산업과장은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이미 반세기 전에 시효를 다한 시대착오적 개념이라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듯했다. 그는 “기본 취지와 달리 표현의 미숙함 때문에 혼란을 끼쳤다”며 “문제가 된 선정 기준이 관할 실국장에게도 보고되지 않은, 내부 검토용 자료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세종도서 사업이 국민 세금으로 운용되는 만큼 최소한의 보편성과 공익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토론회 내내 굽히지 않았다.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겠으되, 어떤 보편성과 공익성이냐를 두고서는 토론회에 참석한 문인들과 정부 관리의 생각 사이에 메꾸기 힘든 틈이 벌어져 있는 듯했다.
신용목 시인은 “문학은 보편화가 아니라 특수화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어떤 소설 한편을 사랑이니 구원이니 하는 식의 추상적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면 300쪽 안팎의 긴 분량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까닭은 거기 그려진 구체적·개별적 삶을 만나고 그로부터 모종의 보편적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문학이란 기왕의 보편성에 흠집을 내고 그 한계를 깨뜨림으로써 더 넓고 깊은 보편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험과 도전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보편성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한계와 제약으로 구속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문체부 과장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공익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공익이란 국가나 민족 또는 사회의 이익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문학이 추구하는 공익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크고 높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본 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책 <윤리21>의 통찰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칸트의 저술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논지에 기대어 ‘공적’이라는 것과 ‘사적’이라는 것의 개념을 뒤집는다. “통상적으로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국가니 사회니 종교니 하는 집단의 이익을 챙기는 태도가 오히려 사적인 것이고,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이야말로 진정 공적인 존재라는 칸트-가라타니의 가르침은 문학적 공익성의 알짬을 담고 있지 않겠는가.
문제가 된 선정 기준 가운데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라는 조항 역시 문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문체부 과장은 문학 작품이라 하더라도 산업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문인들은 즉각 문학을 상업주의에 투항시키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문학 도서 역시 상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 작품 자체를 상업적 잣대로 판단하려는 것은 반문학적 태도라는 것이다. 상업적 가치에 굴하지 않겠다는 것은 문학과 문학인들의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에 해당한다. 문학은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는 것이며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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