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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공농성

등록 2015-02-27 19:48수정 2015-02-27 21:2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엄마 냄새 참 좋다>
유승하 지음, 창비, 2014
<20세기 여성 사건사>박정애, “을밀대 위의 투사 강주룡”
길밖세상 지음, 여성신문사, 2001
<식민지 시대 여성노동운동에 관한 연구>, 서형실 지음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1990
연휴에 방안을 뒹굴며 <제이티비시>(jtbc) 뉴스를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손석희 앵커가 ‘체공’(滯空)을 주제로 한국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에스케이(SK)브로드밴드·엘지(LG)유플러스 비정규직 인터넷 설치 수리기사인 강세웅·장연의씨 14일째, 쌍용차 김정욱·이창근씨 68일째, 스타케미칼 차광호씨의 267일째(2월18일 기준) 고공농성이 같이 보도되었다.

강주룡(1901~1932). 짧은 생애에 자료도 드물지만 사연은 길다. 농사를 짓다가 스무 살에 다섯 살 아래 남성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5년 후 남편이 사망한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지만 시집은 “서방 잡은 년”이라고 그녀를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 그것도 죄라고 유치장에 있다가 풀려난 후, 친정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고무신 공장 노동자가 된다. 당시 일본 남성의 임금이 100원이라면, 조선 여성의 임금은 25원이었다.(2014년 현재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0% 내외, 가사노동 시간은 6배다.)

젖먹이를 옆에 놓고 여성 노동자들은 130도가 넘는 공장에서 고무 찌는 냄새를 견뎌야 했다. 12시간 노동, 성희롱, 욕설과 구타는 기본. 불량품은 물론 코를 풀어도 벌금을 내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회사가 17% 임금 삭감을 선언하자 파업, 해고, 구속에 지친 그녀는 평양의 유명한 정자인 을밀대(乙密臺)에 올라간다.

“우리는 임금 삭감을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평양 전체 고무 직공의 임금을 깎는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평양의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롭다는 것입니다.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 삭감을 취소하지 않는 한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 이기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 죽을 각오로 싸울 뿐입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 나는 울컥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배운 지식 중 “가장 귀하다”는 그녀의 마음이다.

을밀대 농성과 지금 투쟁을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 공통점은 “이기려고 올라갔다”는 점이다. “극단적 수단”, “죽음을 각오한 투쟁”, “빨리 내려오길 바란다” 등 고공농성에 대한 시선은 다양하지만, 체공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 체공에 대한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과 땅 사이가 아니라 땅의 연장이다. 지구에 하늘, 땅, 바다가 있다. 포유류인 사람은 바다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은 땅뿐이다. 그런데 땅에서 살 수 없다면? 쫓겨난다면? 사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땅에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늘은 평등하다. ‘마카다미아 항공기’에 타지만 않는다면 계급, 직급, 성차별은 없다. “신 앞에, 법 앞의 평등”이라는 속임수가 아니라 중력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현실에 맞서 살려고, 이기려고 올라간 것이다. 생명을 위한 절박한, 당연한 선택이다. 고공으로의 도약은 투쟁 수단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최강의 에너지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체공자들은 세상에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우리가 내려가야 하는가, 당신들이 올라오면 안 되는가? 몸무게도 중력 앞에서는 평등하다. 뚱뚱하다고 먼저 떨어지지 않는다. 고공에 사는 것, 이것은 새로운 존재성이고 지금 그들은 인간의 조건을 실험하고 있다. 하늘을 향한 땅 위는 이(我) 세상도 저(彼) 세상도 아니다. 인간을 적대하는 차별과 분리의 기준, 그 경계에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이 이미 말했다. 자기 땅에서 저주받은 사람들, 대지에서 쫓겨난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 The Wretched of the Earth)이 갈 곳은 어디인가. 땅 위 말고, 이기는 것 외에 방법이 있는가. 이기지 않으면 죽음인데.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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