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설사의 알리바이’, <김수영 시선-거대한 뿌리>
김수영 지음, 민음사, 1974
‘설사의 알리바이’, <김수영 시선-거대한 뿌리>
김수영 지음, 민음사, 1974
우리의 ‘거대한 뿌리’는 김수영이 아닐까. 내게는 아직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초판(1974) 2쇄(1978)가 있다. 김수영과 김현의 사진이 나란한 띠지에다 비닐 커버까지 온전하다. 띠지에는 시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아픈 몸이’의 일부) 그리고 김현의 시 같은 비평이 있다. “김수영의 주제는 자유지만 그는 자유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시적 이상으로서 자유. 이것을 실현 불가능하게 하는 여건에 대해 노래한다. 아니, 절규한다” 띠지가 책 한 권을 대신할 수 있다면, 이 시집이 모델일 것이다. 표지는 최근 것과 달리 회색과 황토색이 섞인 멋진 색감 위의 친필 원고다.
널리 알려진 김수영의 아름다운 박동들이 이 시집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마지막 쪽의 ‘풀’을 비롯,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政治意見의 우리말이 생각이 안 난다…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언어가 선사하는 벅차오르는 행복이다.
나의 시선은 ‘설사의 알리바이’(132~133쪽). 시를 전재해야 마땅하지만 작품 후반부만 옮겨본다.
言語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履行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詩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내 맘대로 훼절하면,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괴로움을 겪지 않으려는 인간의 못남 때문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괴로움의 이행. 이행(履行)은 신발을 신다, 밟는다, 겪는다는 뜻이다. 겪어내는 것. 그것은 쏟아내는 것, 내뱉는 것, 통과하는 것과 다르다. 말/글을 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시는 말의 태초다. 시인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오만해야 한다. 오만하지 않으면 성실하지 않은 것이다. 무지와 편견으로서의 오만이 아니라 어떤 힘 앞에서도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는, ‘을’의 의미를 전복시키는 오연(傲然)함이다. 시인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권력은 우습게 본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이 말은 재해석이 필수적이다. 용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개천에서 시를 쓰면 된다. 개천이 시궁창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시로서 개천을 새롭게 하자. 쉬지 않고 괴로움을 겪어내는 김수영의 삶은 창작의 고뇌가 아니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 기존의 언어를 거부, 최소한 기피하기 위해서 언어는 죽음의 벽을 뚫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극단의 타자인 죽음을 통과한 시인의 얼굴은 금이 가고, 작동하지 않은 머리는 불을 토하고, 그러다가 기진하면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괴롭기 위해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분은 그냥 ‘놈팽이’다. 존재의 이전이 괴로운 것이다. 몸이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기술(상품)의 새로움은 반가워하나 ‘다른 목소리’는 못 견뎌한다.
이 사회는 정해진 답이 있다. 새로운 말은 오답이다. 각자 자기 헤게모니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쪽은 ‘종북’, 어떤 쪽은 관용과 인권, 페미니즘 같은 서구에도 없는 ‘고상하고 앞선’ 가치가 답이다. 그걸로 권세와 명예욕, 인식의 기득권을 누리며 큰소리칠 수 있는데 죽음으로 언어의 벽을 뚫는 시인이 반가울 리 없다. 물론 김수영은 이미 알았다. “요는 정치의견이 맞지 않는 나라에서는 못 산다”(151쪽).
정희진 여성학 강사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履行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詩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내 맘대로 훼절하면,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괴로움을 겪지 않으려는 인간의 못남 때문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괴로움의 이행. 이행(履行)은 신발을 신다, 밟는다, 겪는다는 뜻이다. 겪어내는 것. 그것은 쏟아내는 것, 내뱉는 것, 통과하는 것과 다르다. 말/글을 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시는 말의 태초다. 시인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오만해야 한다. 오만하지 않으면 성실하지 않은 것이다. 무지와 편견으로서의 오만이 아니라 어떤 힘 앞에서도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는, ‘을’의 의미를 전복시키는 오연(傲然)함이다. 시인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권력은 우습게 본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이 말은 재해석이 필수적이다. 용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개천에서 시를 쓰면 된다. 개천이 시궁창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시로서 개천을 새롭게 하자. 쉬지 않고 괴로움을 겪어내는 김수영의 삶은 창작의 고뇌가 아니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 기존의 언어를 거부, 최소한 기피하기 위해서 언어는 죽음의 벽을 뚫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극단의 타자인 죽음을 통과한 시인의 얼굴은 금이 가고, 작동하지 않은 머리는 불을 토하고, 그러다가 기진하면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괴롭기 위해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분은 그냥 ‘놈팽이’다. 존재의 이전이 괴로운 것이다. 몸이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기술(상품)의 새로움은 반가워하나 ‘다른 목소리’는 못 견뎌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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