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10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10
오가는 이들로 번잡한 퇴근길 서울 중심가.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팔이 닿을 정도다. 이어폰을 꽂은 채 손바닥(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걷던 여성이 나와 부딪혔다. 그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은 상태였고 나는 사람을 피해가던 중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앗, 죄송합니다”, “(훑어보며) 앞에 사람 안 보여요?” 서로 할 말이 바뀐 것이다. 죄송하다고 말한 내가 한심했지만 곧 자존심을 회복했다. 나는 그냥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고 그의 무례도 평소 사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습관이 판단을 대신하고 삶은 지속된다.
‘주간(週刊) 찰리(Charlie Hebdo)’, 샤를리 에브도 사건 관련 여론에서 자유와 관용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상투적이지 않은가? “표현의 자유(의 지나침) vs (그래도 용납할 수 없는) 테러”와 “관용 vs 종교 근본주의”가 문제란다. 이런 논의는 대립하는 두 가지를 다 옹호할 수 없으므로 양비론으로 끝나기 쉽다.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내 의문은 한 가지였다. “얼마나 분노했기에 비난받을 것이 뻔한 행동을 했을까?” 서구 중심의 국제사회는 북한이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행동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괴물화되어 있다. 폭력적이고 광신적이고 비합리적이어서 궁금할 것이 없다. 어떤 뉴스에서도 이슬람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어린이에게 “왜?”부터 가르친다는 프랑스의 자부심 넘치는 교육 방식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표현의 자유와 관용이라는 시각 자체가 이미 프랑스 주류 사회와 잡지사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겨우 풍자를 했다고 살인을 하다니”, “우리는 자유를 옹호하지만 이슬람들은 폭력적이야” 이 얼마나 설득적인가? 사람들은 미국이 하면 전쟁, 제3세계가 하면 테러라는 인식에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특정 프레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식으로 말하는 순간, “그럼 테러가 정당하다는 말이냐”는 엉뚱한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윤봉길, 신채호, 김구 모두 무장론자였다. 문제는 테러냐 아니냐가 아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를 위한 것이지만 행사하기 매우 힘든 권리다. 약자의 언어는 희미하거나 맥락 없이 폭력적으로 보인다. 본디 표현의 자유는 지향이지 실재가 아니다. 실재인 순간, 언어를 가진 자의 폭력이 된다. 권력을 향한 풍자는 미학이지만 약자를 조롱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렇다면 펜을 부리는 자들은 무엇이 권력인지에 대한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는가.
100만명의 유럽인과 각국 수상이 외치는 “관용”은 자신의 관용에 대한 자랑인 듯하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표현의 자유였을 뿐인데, 너희는 관용이 없구나. 우리는 ‘테러범’에게도 관용을 베푸는데”. 잡지가 주로 우파와 종교를 비판한다거나 이슬람 사회의 성차별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 이슬람도 서구도 내부는 이질적이며 프랑스도 성평등 사회는 아니다.
사건의 성격은 의외로 ‘간단하다’. 같은 시각으로 다룬다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번 사건 하나로 폭발한 것이 아니다. ‘문화선진국’은 국제사회에서 이미지와 여론의 절대 약자인 이슬람을 모욕했고 누적된 분노는 ‘테러’로 표출되었다. 서구의 타자 남미 출신 교황만이 이슬람의 심정을 아는 듯, 타인의 종교를 조롱하지 말라고 말했다.
가장 ‘프랑스적인 삶’, 샤를리 에브도에는 성역이 없다고? 성역은 선택하는 것이다. 1970년 창간된 이 잡지는 1961년 10월17일 ‘파리 대학살’ 때는 프랑스인이 아니었나 보다. 당시 수천명의 알제리 이민자들은 그들에게만 강요된 통금령을 해제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파리 경찰청장의 공식 명령 아래 특공대는 시위대를 무차별 총격해, 200명의 알제리인이 센강에 버려졌다. 강물은 시체를 다 담그지 못했다. 이후 아무도 정식 기소되지 않았다.
이 글은 서구 정치철학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온 웬디 브라운의 대표작 <관용>에 대한 이 순간 나의 독후감이다. 제목에 요지가 뚜렷하다.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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