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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무청 김치와 더덕주

등록 2015-01-23 19:50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토지>, 박경리 지음
지식산업사, 1979
“<토지>를 만화로 읽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문학 강좌에서 만난 청중이 질문했다. “예? 만화요? 글쎄요…” “안 읽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 “어쨌든 모르는 것보단 낫잖아요?” 질문은 주장에 가까웠다. 나는 당황했고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장편 소설이라는 의미의 노블(novel), 노블 그래픽인 만화에 대한 편견은 없다. 다만 1979년 출간된 지식산업사 판형 <토지>, 이단 세로쓰기에 마른 조곡(粟穀)만한 글자 크기로 읽었던 나로서는 ‘만화 <토지>’가 실감나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웬만한 고전은 거의 만화로 출간되어 있었다. 만화와 소설은 다른 장르다. 마치 <전쟁과 평화>를 시로 읽어도 되나요, 여행 대신 여행기를 읽어도 되나요, 같은 질문이다. 아마 인문학 고전을 읽어야 하는데, 방대하므로 영상이나 요약본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면 안 읽는 것보다 낫다는 요지인 듯하다.

하지만 그림은 글씨보다 쉬운가? 왜 책을 읽는가. 책은 줄거리인가. 만화 <토지>, 드라마 <토지>, 소설 <토지>는 어떻게 다른가. 앞서 말한 청중은 만화 <토지>를 읽고 소설 <토지>에 흥미가 생겨서, 결국 소설을 읽은 학생이 있다며 만화의 효용성을 주장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예술로서 독자적인 장르인 만화를 차별하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화가라면 모욕을 느낄 것 같다. 만화나 드라마는 소설 읽기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보조 장르도, 중간 다리도 아니다. 미디어가 메시지다. 형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세가지는 모두 다르다. 다른 경험, 효과, 학습이다.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세계가 있듯이, ‘지루한 독서’만이 선사하는 경험이 있다. 주변에 표절 시비가 많다 보니, 나는 표절을 하더라도 직접 타자를 치는 것과 다운로드하는 것은 다르다고 농담하는데, 방법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읽기는 내용 습득이라기보다는 읽는 과정에서 느끼는 혼란과 즐거움이다. 특히 청소년기의 책읽기는 중요한 훈육이다. 입시 제도와 별개로, 무엇을 하든 한 가지 일에 몇 시간 정도 집중력과 노동을 견디는 것은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책은 책으로 읽어야 한다. 번역본도 읽지 말라는 이들이 있는데 비현실적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원서의 어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렇게 오만한 것이다. 쉽게 쾌락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드라마 <미생>에서 완전 감동받은 대사 “회계가 재무의 언어”이듯이, 회계는 회계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활자는 활자대로 각자의 장치가 있다. 회계라는 언어의 전문성이 있고 따로 힘들게 공부해야 하듯이, 활자 역시 만만치 않다. 활자는 단순 글자가 아니다. 다른 매체에는 없는 심오한 행간, 오식(誤識)으로 인한 우연한 앎의 가능성, 투지(透紙, 종이가 찢어지도록 뚫어지게 봄)가 책 내용을 만든다.

독서의 목적은 생각하는 긴장과 외로움, 쾌락을 얻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명작’을 읽기보다는 소위 킬링 타임용 책이 낫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인 ‘펄프 픽션’은 요약본이 없다. 책의 본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 읽는 것이 아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과 읽은 것을 전제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다.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예수’(마르크스, 푸코, 프로이트…)를 읽은 사람은 많은데(?), 예수다운 사고방식을 하는 이가 드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주변에 많지 않은가? 자칭 타칭 책은 많이 읽었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갑 선생’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그렇다면, 나는 열 몇 권의 <토지>에서 무엇을 배웠나? 없다. <파시>(波市), <김약국의 딸들>을 훨씬 좋아한다. 일단 대하소설은 서사 아니, 거대 담론이지 소설(小說, 작은 이야기)이 아니다. <토지>에서 얻은 것. 몇 권째인지도 모르고 정확하지도 않지만, 독립군들이 지리산 깊은 산사에 묻어둔 소금에만 절인 오래 묵은 무청 김치와 더덕주의 향기에 대한 상상이다. 이 정도면 투자 대비, 상당한 성과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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