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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

등록 2014-12-19 20:14수정 2014-12-19 22:41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고통의 문제> C.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홍성사, 2002
삼한사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사계도 그럴 위기다. 봄과 가을은 짧아졌고 겨울은 한해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아, 삼시 세끼 나오는 따뜻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친구가 “그게 바로 천당”이란다. 그렇다. 천당이 없다면 하느님도 없을 것이다. 그의 절대 권능은 천국 제공으로 증명된다. 아님, 최소한 천당 가는 방법이라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천당은커녕 고통을 주신다. 하느님이 선하다면 왜 무고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 왜 세상에 악이 판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원망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기독교 사상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는 이에 대한 고전적 답변이다. 이 책은 1940년에 출간된 그의 첫 신학 저서로, 기독교인이 아닌 이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고통을 질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린다. 신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진 인간은 고통으로 인해 온전해진다.(146쪽) 책의 요지는 고통은 피할 수만 있다면 겪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의미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 이런 종류의 인생사는 의미 추구만이 답이다. 고통의 가치는 오로지 해석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왜 나만?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Father in Heaven)가 아니라 집에 계신 인자한 나의 할아버지를 원한다.” 하지만 본디 하느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정의로운 질서이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따뜻하고 관대하고 친절하기보다 단호하고 영광스러운 특별한 것이다.(59~68쪽)

루이스의 재치대로 아버지는 유일한 절대자지만 할아버지는 보통명사다. 이것이 ‘고등 종교’의 출발이다. 심판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정의롭고 고뇌에 차 있다. 사랑을 퍼주는 만만한 분이 아니다. 이 책의 맥락에서는 할아버지는 기복 신앙을 상징하고, 차원 높은 믿음은 아버지가 실현할 일이다.

여기까지가 루이스와 그로 대변되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그의 다른 책)의 몫이다. 그다음부터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주, 주인, 조물주를 아버지라고 상정한 이상 불가피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의 법’은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언설이다. 흑인 신학이나 페미니즘의 줄기찬 문제제기 속에서도 여전히 아버지는 백인 남성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다른 세계에 산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지만 아버지에 의해 거세된, 말글대로 힘이 없어진 존재다.

문제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대부분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법’을 제대로 실현하는 책임 있는 가부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남성들 사이에는 첨예한 계급 격차가 있어서 부양자, 보호자라는 남성의 성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인간성을 구비한 남자는 드물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여서 남성 개인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사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를 보호하는 아버지? 세상을 구속(救贖)하는 아버지? 아버지들이 직접 호소하다시피 그들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기들끼리의 경쟁이지만, 어쨌거나 경쟁사회에 지쳐 있다. 기대는 버린 지 오래. 무책임, 폭력, 찌질함이나마 좀 관리해 주었으면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의로운 신앙인들은 심판할 능력도 없는 아버지의 권위적인 사랑보다는 ‘어머니’, 그녀가 노동으로 만들어가는 보살핌 윤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죽은 다음은 모르겠고 생전에 어느 정도의 복지가 실현되면 그게 천국이다. 싸고 편리한 도시 가스가 전국에 공급되고, 노숙인들이 동사하지 않고, 끼니가 서러운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부자들에게 천당행 티켓(세금)을 팔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부자도 낙타와 경쟁하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다. 저렴해도 충분하다.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지금 여기에 천국을.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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