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소설가
눈발 날리는 흐린 하늘이다. 달력이 정해놓은 ‘일년’이 무에 그리 중요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12월엔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즈음엔 책상 한녘에 오래된 책 몇권을 꺼내 올려두고 가끔 몇페이지씩 펼쳐본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눈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책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일기 모음집인 <순교일기>도 그중 하나다. 한국엔 1997년에 나온 책인데 지금은 절판되었고, 그의 예술론인 <봉인된 시간>은 절판되었다가 2005년에 복간되었다. 만약 단 한명의 영화감독 작품만 가지고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고민할 것 없이 나는 타르콥스키 영화 7편을 챙길 것이다. <순교일기> 중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또 향상시키는 것.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당국의 갖은 검열과 열악한 창작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토록 오래 지구를 떠받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환멸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던져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틀라스를 주목한다고 일기에 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지구를 떠메고 사는 것일 테다. 최선을 다해 이 무게를 견디고 있는 지금 여기. 산다는 것 자체가 정성인 시절이다. 지상에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조차 저마다의 무게를 지고 간신히 착지하는 듯한 날들. 그 여린 발자국들 위에 한가닥씩의 빛이 드리우기를.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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