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소설가
좋은 예술은 기본적으로 치유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예술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의 역할을 한다. 나는 쇼팽의 ‘녹턴’ 전곡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힘든 상황에서 받은 상처를 위해서라면 그의 ‘폴로네이즈-판타지’를 듣곤 한다. 조르주 상드와의 뜨거운 사랑의 파국,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 등 심신이 모두 상처로 가득했던 쇼팽 인생 말기작 중 하나인 이 폴란드 춤곡엔 무언가 있다. 상처의 흔적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 말이다. 비애의 경험자가 승화시켜낸 예술, 상처 입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로부터 건져 올린 예술언어는 그래서 힘이 세다. 이것은 좋은 환경에 태어나 고민 없이 엘리트의 길만 걸어온 이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신산함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철없는 공주님이 좋은 예술가가 되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 당연한 얘기지만 문학은 삶을 위해 있다. 문학 자체에 무슨 절체절명의 가치가 있다는 듯한 문학주의적, 탐미적 경향에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한번뿐인 삶을 사랑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문학은 존재한다. 극도로 배타적인 집중을 요하는 예술이 상처받은 인간들을 그들만의 골방에서 끌어낸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예술을 저 높은 천장 금고에 보관하며 떠받들지 말고 삶의 비타민으로 영리하게 사용하자. 예술은 숭배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다. 고단한 일상일수록 더더욱!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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