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배병삼, “한 칸의 사이”
<녹색평론>, 139호, 녹색평론사, 2014
배병삼, “한 칸의 사이”
<녹색평론>, 139호, 녹색평론사, 2014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부러운’ 사람도 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거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경우다. 실종에 지친 이들은 “차라리…”라는 말을, 삼키지도 호소하지도 못하고 산다. 실종된 자식, 특히 딸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큼 고문은 없다. 그런 점에서 아동 납치 살해 실화를 다룬 미국 영화 <체인즐링>의 마지막 대사는 이상하다. 실종된 아이의 시신을 찾은 부모, 생존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가장 애를 쓴 엄마(앤절리나 졸리)는 아이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희망”을 외친다.
시신은 영어로 보디(body)다. 이 단어를 해석하자면 책이 몇 권 나올 테지만, 보디는 죽음을 실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변화가 있긴 하지만, 용의자의 자백과 증거가 완벽해도 시신이 없으면 형사 사건이 성립하지 않는다(no body, no case). 사건 자체가 무효다. 시신을 찾지 못하면 용의자와 협상, 보험 처리 등 ‘더’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수색 작업이 중단되었다.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는 잠수사들의 안전을 고려해 “수중 수색을 내려놓기로 했다”. 아홉 명 실종자의 몸. 자식의 시신은 죽음을 실감하는 차원을 넘어 그 몸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운 감촉이 영원히 사라졌다. 시신을 찾지 못한 유가족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함께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세월호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돈과 욕망의 추구, 파렴치한 ‘한강의 기적’의 현재진행형이다. 아니, ‘한강의 기적’은 어불성설이고, 이 말이 좋은 의미라 할지라도 노동자가 만든 현실이지 기적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현대사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녹색평론>의 존재일 것이다. 이번호에서 정치철학자 배병삼의 “한 칸의 사이”(58~71쪽)를 읽다가 위로받았고 위로받음에 죄책감을 느꼈다.
처음 한자를 배울 때 좋을 ‘호(好)’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개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 좋다’다. 배병삼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나도 계속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1899년 발견된 갑골문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여성이 어린 자식을 가슴에 끌어안고 꿇어앉아 있는 모습(好)을 좋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유교의 장례인 삼년상(三年喪)은 ‘好’, 즉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에 주목하는 것… 상실감의 고통, 황폐한 심정, 다시 만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보길 촉구하는 의례가 삼년상”이다.(63쪽) 어미와 자식이 껴안고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다. 부정하고 싶은 이 상황을 실감하는 과정이 삼년상이요, 시묘다. 삼년상은 유아기 3년의 절대적 의존 기간에 근거한 것으로 꼭 3년일 필요는 없다.
배병삼은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는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삼년상은 유교의 후진성, 야만성의 상징이었다. 슬픔과 속도주의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강박적인 발전 제일주의에서 슬픔은 지체와 과거 지향을 의미했다. 슬픔은 소모적이라는 통념,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재촉. 근대화를 위해 삼년상은 괴이함, 비합리성, 비효율로 인식되었다. 의례에 대한 낙인과 함께 슬픈 감정도 부정되었다.
수색 중단.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랑하는 이의 몸과 헤어질 시간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모자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껴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사라졌고 찾을 수 없다. 부비고 만지고 안고 수없이 뒤돌아보는, 작별할 몸이 없다. 그날 하늘이 대신 울어주었다.
사족-흔히 유교와 페미니즘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지만(66쪽), 내 생각은 다르다. 각각의 사상들은 맥락에 따라 적대, 조우, 무관하다. 본질적인 대척은 없다. 원전, 해석, 실행이 일치하는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유교, 여성주의, 마르크스주의, 심지어 파시즘도 이론은 훌륭하다. 문제는 권력으로서 지식이 약자에게 억압의 근거로 작동하는 현실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도 인간의 실행에 불과하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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