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뫼비우스 띠로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 지음
임옥희 옮김, 여이연, 2001
<뫼비우스 띠로서 몸>, 엘리자베스 그로츠 지음
임옥희 옮김, 여이연, 2001
짧은 길이겠지만 가을의 진입로인지 요즘 심야 라디오엔 외로운 사연과 신청곡이 넘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다가갈 수 없다, 세상 모든 만물들아 내 마음을 전해다오…. 이 심정이 어찌 이성애에 그치겠는가.
상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처(處). 상처받았다, 입었다, 떠난 자리가 크다는 등의 용법으로 봐서 상처는 몸에 있는 어떤 곳, 장소다. 이곳이 사라지는 경우는 두 가지. 하나는 아픔(傷) 자체가 없어지는 것. 또 하나는 아픔이 너무 커서 그 부위(處) 세포가 죽어버리는 것. 상실이다. 이때 내 몸의 일부를 이루었던 ‘사람’은 상실‘감’, 느낌으로 대체된다.
자주 사용하던 물건을 잃어버려도 한참 허전한 법이다. 반려동물이나 가족, 친구, 정인(情人)과의 이별과 죽음. 예술가라면 어떻게든 표현이 가능하겠지. 나처럼 표현이 안 되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된다. 나는 최근 몇 년 소중한 사람 둘을 잃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현재 내게 그 시절은 다른 삶, 전생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때가 인생이었고 지금 나는 죽어서 지옥에 살고 있다. 나는 숨만 쉬는 유령. 존재하지 않고(“사람 구실을 못하고”) 아프기만 하다. 온몸이 환상사지(幻想四肢, phantom limb)인 셈이다.
환상사지는 다양한 책에 여러가지 번역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의학 용어지만 가장 적절한 자리는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뫼비우스 띠로서 몸>이 아닐까(164쪽~) 생각한다. 이 책은 근대와 탈근대의 몸 철학을 다방면에서 깊이 있게 총괄하면서,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해체한 고전이다. 해일 같은 지식.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여성주의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정도다.
환상사지, 헛팔다리, 유령사지, 환상지… 나는 ‘유령 팔다리’로 직역한다. 유령 팔다리는 없는 신체 부위가 아픈 상태를 말한다. 내장 등 다른 부위도 포함되지만 주로 절단한 팔다리, 즉 존재하지 않는 사지가 아프고, 가렵고, 여전히 붙어 있는 느낌으로 고통스럽다. 외과 수술을 경험한 환자의 80% 이상이 호소하는 증상이다. 1551년 프랑스의 외과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e)가 처음 기록했고, 환상사지라는 용어는 1871년 미국의 신경학자 위어 미첼이 명명했다.
유령 팔다리 현상의 의미는 다양하다. 몸은 실체가 아니라 기억, 이미지, 희망(“있었으면”)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잃어버린 사지에 대한 몸 스스로의 애도이다. 없는 부위의 극심한 통증만큼 몸과 마음의 분리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증거하는 현상도 없다.
예전에 “내 안에 너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기쁘게, 슬프게 한 적이 있다. 이것이 유령 팔다리 현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흔적은 내 몸의 일부다. 그들을 잃으면 평생을 상실감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특히 이별이 아니라 죽음인 경우에는 방법이 없다. 그 사람을 위할 방법도 사랑할 방법도 없다. 보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는 것. 그 고통뿐이다.
유령 팔다리 통증은 자연의 일부, 유물론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영혼도 귀신도, 그들이 따로 모여 사는 하늘나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은 영원하고 완벽하고 절대적인 사건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 말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죽음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유령 팔다리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의 고통이다. 내 안의 네가 몸 밖을 나갔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부모는 아이를 낳았다. 자녀는 실제로 몸의 일부다. 아이를 잃은 사람의 통증은 또 다른 차원일 것이다.
4월16일 이후 내가 쓴 거의 모든 글은 10매든 150매든 세월호에 관한 것이었다. 누군가 알아보고 내게 “유가족이냐”고 물었다. 아니다. 하지만 나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잃었다. 그 분노와 후회. 돌이킬 수 없음. 미칠 것 같은 그리움과 주저앉음. 만 3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가 나뿐이겠는가, 세월호 가족뿐이겠는가. 이 고통은 사는 일의 일부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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