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구체성의 변증법>, 카렐 코지크 지음
박정호 옮김, 거름, 1985
<구체성의 변증법>, 카렐 코지크 지음
박정호 옮김, 거름, 1985
K는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로 유명하지만 카프카(Kafka)야말로 본격적으로 K를 독점하기 시작한 인물일 것이다. 더 이상 카프카는 고유 명사가 아니다. “사유가 카프카에서 출발하여 까마귀로 끝나지 않으려면… 전체에 대한 혼돈된 표상으로부터 다양한 규정들과 관계들의 풍부한 총체성으로의 여행이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을 개념으로 만드는 변증법이다.”(33쪽)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 20, 30대에 읽었을 때는 이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1967년 카렐 코지크가 쓴 <구체성의 변증법>은 여전히 권위를 잃지 않는 고전이다. 현실은 인식 과정을 통해 현실이 된다. 그래서 해석과 명명은 중요한 정치다. 이 문장은 현실(present)과 현실의 재현(re-present)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카프카를 사례로 든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다시 보니 카프카와 까마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념처럼 카프카는 본질이고 까마귀는 현상일까. 이건 까마귀에 대한 무시가 아닐까. 카프카가 까마귀가 되지 않아야 한다면 카프카는 무엇일까.
위 문장은 두 가지를 비판한다. 첫째는 환원주의. 변증법은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정신적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이므로 사유의 결과는 “카프카는 카프카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카프카는 까마귀에 (그 유명한) ‘불과하게’ 된다. 환원은 모든 문제는 계급 문제다, 젠더 문제다, 인간성 문제다라는 식으로 한 가지로 수렴하는 사고다.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성을 반복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본질을 벗어나면 곤란하다는 의미다. 작가 카프카가 새 까마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 논의는 모두 변증법의 전제인 현실과 언어, 부분과 전체, 객체와 주체 등 쌍생 개념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이런 구분에 동의하지도 않고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카프카와 까마귀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사실 둘은 코지크의 생각과 달리 각자 독자적이며 고유하고 동등하다. 무관할 수도 경합할 수도 있다. 연결은 없다.
4월16일 이후 불과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전원 구출”이라는 오보에서 시작한 세월호가 지방선거를 거쳐 유가족에 대한 공격과 정치적 이용, 양보, 협상이라는 난센스가 난무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여전히 세월호는 정의되지 않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사회적 교훈이 되는 것. 재발 방지라는 기본 과제부터 사회 전반의 정신적 성숙으로 상승하는 것이 ‘구체성의 변증법’이겠으나, 세월호는 안전 불감증으로 환원되었고 본질은 불순한 세력(정부 여당?)의 개입으로 왜곡되고 있다.
모든 사유가 중단된 채, 모든 정신적 작용이 삭제된 채, 소박한 휴머니즘조차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흑막과 모욕 앞에 무방비 상태다. 이처럼 세월호의 현재는 코지크가 우려한 환원이자 본질 실종이다.
다시 카프카에게 가보자.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등장인물 ‘다무라 카프카’가 무의미할 리는 없다. 일본어의 보통 명사 카프카(カフカ)는 과부하(過負荷)와 가불가(可不可), 두 가지 뜻이 있다. ‘가불가’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상황은 개념화하기 어려운 ‘까마귀’였지만, 까마귀를 통해 그는 카프카가 되었고 변증법이 무시한 까마귀마저 변신시켰다. 그의 인생은 과부하 상태였지만 그로 인해 인식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를 넘나든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황우석’과 ‘세월호’는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는 믿어지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 믿을 수 없는 일. 사법 절차도 하세월인 상황이지만 세월호는 기존 인식의 틀을 벗어나야만 접근 가능하다. 비밀과 거짓말, 부패 결탁의 고리는 어느 뉴스에나 등장하지만 ‘폭식투쟁’으로 상징되는 일부 시민의 행위는 공동체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당황스럽다. 우리는 인간일까. 지속 가능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월호는 코지크를 넘어 카프카로도 까마귀로도 쓰여져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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