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라는 말엔 ‘등급, 의무’ 이런 식의 표현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거부반응이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말보다 더 심각하다. 제한된 예산 내 행정편의주의는 장애인의 삶을 점점 고립시키고 있다. 장애등급제는 의학적 기준만으로 장애를 등급화해 장애인이 실제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장벽이 되어왔다. 매겨진 등급에 갇혀 정작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한 장애인이 많다는 뜻이다. 부양의무제 또한 1촌 이내 가족의 책임으로 부양의무를 전가해 복지 사각지대를 양산해왔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에 반대하는 장애인·빈민단체 공동행동이 광화문역 지하보도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지난주로 2년이 되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장애등급제 폐지, 모든 장애인에게 장애인연금 20만원 지급,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를 통한 사각지대 축소 등을 약속했지만 대통령이 된 뒤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다. ‘장애등급제’라는 이름만 없애고 기존 제도의 모순은 그대로인 제도를 ‘개선책’이라고 내놓고 심지어 기존 제도보다 후퇴한 기초생활보장법이 논의 중이다. 그러는 동안 김주영씨, 박지우·지훈 남매, 송국현씨, 박진영씨가 이 제도의 폐해로 목숨을 잃었다.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부끄럽다. 장애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실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을 위해 너무 많은 수고가 필요한 사회, 욕이 나오지만, 2년을 줄기차게 싸워온 장애인분들 앞에 내 투정은 정말 투정이다.
김선우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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